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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외교·臨政 도운 '광복의 은인들'

하마사 2015. 8. 14. 13:26

[광복 70주년, 숨은 영웅 70人]
[당신들이 있어 대한민국이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 독립운동 도운 외국인들
상하이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한 美 피치 목사, 백범의 탈출 도와
英 베델, 양기탁과 일제침략 고발… 中 쑨커, 해외에 한국 독립 거론

올해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고마운 은인이 너무나 많다. 광복과 건국 그리고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주요 고비마다 헌신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을 선정하고, 지면을 통해 뒤늦은 감사 편지를 보낸다. 때로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정확한 생몰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묵묵히 한국을 도왔던 이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들(Hidden Heros·히든 히어로즈)’이다. 본지는 이들과 유족에게 감사패와 기념 선물(갤럭시탭S)을 전달할 예정이다.

"날마다 왜놈들이 우리 동포들을 잡으려고 미친개처럼 돌아다녔다. 임시정부와 민단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녀 단체인 애국부인회까지도 아예 집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일제는 백범 김구를 체포하려고 현상금 20만원을 내걸고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일제는 임정이 있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 수색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 주둔군 사령부 합작으로 다시 현상금 60만원을 걸었다. 절체절명의 체포 위기에 내몰린 백범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와준 은인이 미국인 목사 조지 피치(1883~1979)였다.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난 피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온정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반일(反日) 정신이 강했다.

1947년 경교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첫줄 오른쪽에서 둘째)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첫줄 왼쪽에서 둘째), 김구 임시정부 주석(첫줄 왼쪽에서 넷째), 조지 피치(둘째 줄 왼쪽에서 첫째)와 부인(첫줄 오른쪽에서 첫째)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구는 손녀 효자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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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경교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첫줄 오른쪽에서 둘째)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첫줄 왼쪽에서 둘째), 김구 임시정부 주석(첫줄 왼쪽에서 넷째), 조지 피치(둘째 줄 왼쪽에서 첫째)와 부인(첫줄 오른쪽에서 첫째)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구는 손녀 효자를 안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 제공

 

피치는 1909년 뉴욕 신학대 졸업 이후 상하이에서 YMCA 간사로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윤봉길 의거 직후에도 피치는 보름이 넘게 2층 전체를 백범 일행에게 내줬다. 피치의 부인은 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밝히고 일제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영문으로 작성했다.

일제 끄나풀이 피치의 집 주변을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정탐하자, 백범 일행은 결국 상하이 탈출을 결심했다. 피치 목사는 차량 운전사로 변장했고, 김구와 피치의 부인은 나란히 부부처럼 뒷자리에 앉아 마당에서 차를 몰고 나왔다. 프랑스 조계를 지나 중국 지역과 연결되는 다리에 이르러서야 피치의 자동차는 멈췄다. 차에서 내린 백범 일행은 미처 인사할 겨를도 없이 짐 꾸러미를 들고 다리를 건넜다.

훗날 김구의 '변장 탈출'로 알려진 사건이었다. 1937년 일제의 난징(南京) 대학살 당시에도 피치는 참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코트 속에 감추고 탈출을 감행했다. 이듬해 그는 미국 전역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했다. 피치 부부는 광복 이후 한국에서 김구 선생과 행복하게 해후(邂逅)했다. 그는 한국과 대만 YMCA에서 활동하다가 1961년 은퇴했다.

한국의 광복을 염원했던 모든 외국인이 피치처럼 행복한 결말을 보았던 건 아니다. 구한말 당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은 양기탁 선생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의 침략을 고발했다. 하지만 일제의 부당한 압력으로 1907년부터 두 차례나 법정에 선 끝에 1909년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베델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다. 구한말 고종 황제를 보필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도움을 줬던 호머 헐버트도 이 묘원에 나란히 묻혀 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미국의 아시아 외교 전략 수정을 미국 정부에 건의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광복 후에도 미군정과 국무부에 한국 입장을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19년 3·1운동의 열기 속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광복까지 26년간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이 기간 임정을 따뜻하게 맞아준 건 중국의 반일 운동가들이었다.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의 아들 쑨커(孫科)는 1942년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과 중한(中韓)문화협회를 조직했고, 국제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했다.

공동기획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조선일보, 2015/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