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한국교회역사탐방

[국민일보 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21) 전남 목포 달리도교회

하마사 2014. 3. 11. 18:01


남쪽바다 반달을 닮은 섬 ‘믿음의 등대’

정(情)과 사랑이 있었다. 평화와 안식도 있었다. 배려와 포용 또한 있었다. 한 마디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성령의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전남 목포 앞바다의 작은 섬 달리도에 있는 달리도교회에서 얻은 느낌이다. 정확한 이름은 달리그리스도의교회이지만 보통 달리도교회라고 불린다.

지난 17일 달리도교회를 찾아 나섰다. 목포 여객선터미널에서 바라본 달리도는 손에 닿을 듯 지척이었다. 목포 남서쪽 30여분 뱃길이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갯내음과 어우러져 묘한 감상을 일으켰다.

달리도 선착장에 내리자 ‘달리도 아름다운 반달섬’이라 새겨진 큼직한 돌비석이 반겼다. 왼쪽 길로 접어들자 갯벌과 밭이 좌우로 펼쳐졌다. 시선을 양쪽으로 옮겨가며 경치를 즐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차로 10분이나 갔을까. 멀리 산기슭에 옹기종기 들어선 민가와 함께 빨간 지붕에 십자가 탑을 세운 교회가 보였다.

교회는 생각보다 컸다. 건물 곳곳은 제법 세월의 흔적들을 갖고 있었지만 비교적 깔끔한 모습이었다. 오른편 사택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섰다.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장의자에 앉자 자연스레 기도가 나왔다. “주님, 이곳에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소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게 해주소서. 주님, 이곳을 축복의 자리로 만들어주소서….”

바다 위의 반달, 달리도

달리도는 반달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2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다. 목포 앞바다의 길목에 버티고 있음에도 다소 생소하다. 원래 무안군에 속했던 섬은 1963년 목포시 충무동으로 편입됐다가 66년 현재의 행정구역인 달동이 됐다.

1구와 2구의 두 부락으로 이뤄진 달리도는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500여명이 살았으나 너도나도 뭍으로 떠나면서 인구가 급감했다. 주민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면서 갯벌에서 각종 먹거리를 채취한다. 재래식 염전에서 천일염을 만들거나 양식업을 하기도 한다.

넉넉잡아 2시간이면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달리도는 목포에서 가까우면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적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빠른 조류와 파도로 생긴 해식애가 절경이다.

달리도행 배는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서 오전 7시, 8시30분, 10시30분, 낮 12시30분, 오후 2시30분, 4시30분에 탈 수 있다.

달리도 사람들, 달리도교회

달동 415번지인 달리도교회는 1구의 중심이다. 전체 주민 50여명 중 40여명이 교회에 출석하니 복음화율 80%인 셈이다. 전승종(50) 목사는 “동네의 대소사가 교회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교회는 신앙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 역할까지 한다”고 설명했다.

교회는 지난 73년에 세워졌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술, 노름에 찌든 사람들로 넘쳐나던 섬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병폐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99년 부임한 전 목사와 이성이(48) 사모는 온 몸으로 나섰다. 부부는 음식과 음료수를 싸 들고 논밭으로 뛰어다녔다. 마침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거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없는 낙원이 됐다.

교회에서 바라보는 달리도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교회 바로 밑에는 염전과 논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깨 콩 고추 등 각종 작물의 밭들과 함께 곳곳에 무화과 과수원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향해 좀더 시선을 멀리하니 빙 둘러싼 섬들로 이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2구 쪽으로 멀찌감치 달리도교회에서 분립한 달리중앙교회의 모습도 보였다.

무화과, 하나님의 선물

달리도교회는 감동적인 사연들을 묻고 있었다. 무엇보다 60대에서 90대까지 노인 40여명의 교회가 해외 선교까지 감당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립도 어려울 것 같은데,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무화과가 우리 교회의 보배”라는 이 사모의 말에서 의문을 풀어갈 수 있었다.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는 뜻의 무화과.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사 38:21)에 나오는 과일이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이스라엘에 빗대 저주한 과일이기도 하다. 그 무화과가 달리도와 달리도교회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을 줄이야.

사연은 이렇다. 전 목사가 12년 전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회는 엉망이었다. 주민들의 생활은 팍팍했고 교회 담임목회자가 수시로 바뀌었다. 그때 전 목사 부부의 눈에 뜨인 게 무화과였다. 무화과를 마을 특산물화하기로 하고 주민들의 재배와 판로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잼이나 즙, 주스로 만들어 팔기도 했다. 때맞춰 무화과가 항암·항염작용 등에 탁월한 웰빙식품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자 부부는 이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교회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는 급격히 커지고 덩달아 교회 재정도 좋아졌다. 교회당과 사택을 보수하고 주위의 어려운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급기야 해외 선교에도 나서 방글라데시 인도 필리핀 등의 선교사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는 건 순전히 하나님과 교회 덕분이지라.” 대규모 과수원을 운영하는 임순규(70) 장로는 그간의 과정을 찬찬히 설명했다.

성령이 일하는 현장

전 목사의 입에서는 “성령이 일하신다”는 표현이 유난히 잦았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였다. 어렵고 힘든 현장에서 눈물로 외치던 전 목사 부부에게 뜨거운 성령의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전 목사는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면서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이런 섬 교회에서 목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이 사모는 성령 체험으로 육신과 정신의 병 고침을 받은 절절한 간증을 갖고 있었다. 전국목회자사모 간증 공모와 극동방송 간증 공모 등에 당선된 이 사모는 요즘 간증 사역에도 바쁘다고 했다.

마침 함께 드리게 된 수요예배는 성령에 매달리는 달리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소박하고 조촐한 가운데서 감동과 은혜가 잔잔하게 흘렀다. 환갑을 지낸 주영호 집사가 전자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66세의 박순옥 권사가 드럼을 치는 모습만도 색다른 감동이었다. 전 목사는 예레미야 33장 1∼9절을 본문으로 설교했다. 그는 위로와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쉽게 전했다. 교인들은 끊임없이 “아멘”으로 화답했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소망이 있었다. “아따, 우리 교회 참 좋지라.” 그들이 떠난 까만 밤길 속에서 한 교인의 말이 한동안 여운을 남겼다. 교회 전화 061-246-3079.

■ 근처 맛집 - 한국추어탕

목포의 먹거리로는 주로 민어회와 매운탕, 세발낙지 등이 꼽힌다. 하지만 하당신도시 이마트 건너편에 있는 한국추어탕(061-282-5080)은 미꾸라지 요리로 목포의 명물로 부상하고 있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이 음식점의 주 요리도 추어탕과 튀김. 하지만 맛에서는 많이 차별화된다. 보기에는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이곳 추어탕은 깔끔하고 담백한 뒷맛을 남긴다. 튀김도 비린내가 전혀 없으면서 입에서 살살 녹는 느낌을 준다. 추어탕은 8000원이고, 튀김은 소·중·대로 나뉘어 1만2000원, 1만5000원, 2만5000원.

색다른 맛을 즐기려는 이들을 위해 개발한 메뉴도 있다. 싱싱한 전복을 듬뿍 넣어 끓인 전복추어탕이다. 국물 맛도 독특하지만 쫄깃쫄깃한 전복을 씹어 먹는 맛도 좋다.

다양한 전골 세트도 이 음식점의 ‘장기’. 전골은 1인분 9000원이며 전골과 튀김, 볶음밥을 묶어 3인용(3만7000원)과 4인용(4만5000원)이 준비돼 있다. 그 외 미꾸라지 숙회와 미꾸라지 야채가스 등도 별미다.

계란찜과 두부, 생선구이 등 밑반찬도 좋다.

맛의 비결에 대해 임형희(44·여) 대표는 자연산 미꾸라지에 최상의 재료를 고집한다고 설명했다. 임 대표는 또 개업하기 전 전국의 소문난 추어탕집을 다니며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했다고 덧붙였다.

이 음식점의 차별성은 또 있다. 음식점을 들어서면 찬양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실내 곳곳에 성구가 걸려 있다. 목포순복음축복교회 집사인 임형희 대표는 “예배로 영업을 시작하고 예배로 마무리한다”고 설명했다. 목포시 상동 787의 4번지.

목포=글 정수익 선임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sagu@kmib.co.kr

 

-국민일보, 201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