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몰라서 두려운 病 치매…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온다
최근 유명人事들, 치매로 자리 잃거나 칩거하는 경우
많아
2030년엔 100만명 넘을듯… 고령화사회 진입한 한국 위협
영화·드라마에서나 보던 '젊은층 치매'도 늘어나는 추세
지난 30일 오후
9시쯤 전남 화순군의 한 단독주택 앞에서 만난 김모(74)씨는 수년 전 치매에 걸린 남편을 큰아들과 함께 돌보고 있다고 했다. 그의 남편은
1970년대 유신 체제 교육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송모(78) 명예교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송 교수는 지난 29일 법원 공판에서 35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 법정에서 그는 재판장이 생년월일과 주소를 묻자 말없이 웃기만 했다. 피고인석을 찾지 못해 법대(法臺)까지 걸어가다 제지당하기도 했다. 1970~80년대 현실 참여 교수로 이름을 날렸던 저명 교수에게 치매가 찾아온 것이다.
김씨는 "남편은 이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예전 일도 전혀 기억 못 한다"며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다가 주변 권유로 그날 법정에 나갔는데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당황했다. 가는 게 아니었는데…"라고 말했다. 이어 "남편 일에 대해선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현관에서 나와 부인을 먼발치서 지켜보던 노(老)교수는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이는 기자에게 목례로 화답했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송 교수는 지난 29일 법원 공판에서 35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 법정에서 그는 재판장이 생년월일과 주소를 묻자 말없이 웃기만 했다. 피고인석을 찾지 못해 법대(法臺)까지 걸어가다 제지당하기도 했다. 1970~80년대 현실 참여 교수로 이름을 날렸던 저명 교수에게 치매가 찾아온 것이다.
김씨는 "남편은 이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예전 일도 전혀 기억 못 한다"며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다가 주변 권유로 그날 법정에 나갔는데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당황했다. 가는 게 아니었는데…"라고 말했다. 이어 "남편 일에 대해선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현관에서 나와 부인을 먼발치서 지켜보던 노(老)교수는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이는 기자에게 목례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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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환자 수와 사회적 비용 현황에 관한 그래프
대형 금융사의 라모(75) 전 회장은 회사 횡령·배임 사건과 관련해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작년 11월 공판에 나오지 않았다. 법원은 "라 전 회장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어 법정에 출석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고 밝혔다. 알츠하이머는 혈관성 치매와 함께 대표적인 치매 질환의 일종이다. 라 전 회장은 최근 본지 취재팀과 통화하며 "내 증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줄 수는 없지만, 물건을 둔 장소나 약속 시간 등을 가끔 잊어버리긴 한다"고 말했다. 금융권에 50년 넘게 몸담으면서 한때 '한국 금융의 신화'로 불리기도 했던 그도 치매는 피할 수 없었다.
재력과 권력을 동시에 쥐었던 유명 인사 중에도 치매 환자는 많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공직에 입문해 옛 재정경제부 공보관,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등 이른바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국책 금융기관 전 사장 김모(60)씨는 2011년 9월 임기 두 달 만에 사직서를 냈다. 명목상으로는 '일신상 사유'를 들었지만 그의 지인들은 치매를 앓고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 중견 배우 임모(57)씨와 지난해 회사 돈을 횡령한 죄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T그룹 이모(여·85) 전 상무도 치매 환자로 알려졌다. 임씨는 최근 언론을 통해 "사업 실패 등으로 2년간 165억을 잃은 뒤 술에 빠져살다 알코올성 치매에 걸렸다"며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T그룹 이 전 상무는 치매뿐만 아니라 척추골절 수술 후유증, 심장질환에까지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상무가 수감돼 있던 서울구치소는 지난 3월 그의 건강 상태가 수감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판단해 검찰에 형집행 정지를 건의했고, 검찰의 3개월 형집행 정지 결정으로 최근 이 전 상무를 풀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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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빨라지는 '치매 시계'… 치료 수준 어디까지 왔나
英서 조사… 치료 안한 10명중 6명은 요양원 갈 정도로
악화
한국, 치매 57만명중 절반만 치료… 나머진 病 사실조차 몰라
'치매는 못고친다' 잘못된 인식 탓에 상당수가 치료시기
놓쳐
전문가 "조기 발견땐 완치까진 안돼도 病 속도 크게 늦춘다"
김기웅
국립중앙치매센터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최근 영국 연구진이 치매 초기 단계에 있는 환자 270명을 5년간 추적해 얻은 결과를 소개했다. 치매
발병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약물치료를 꾸준히 한 사람의 90%는 5년 후에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던 반면 치료를 포기한 사람은 10명 중
6명이 요양 시설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치매 증상이 심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자포자기(自暴自棄)하던 과거와 달리 꾸준한 치료에
따라 치매 환자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며 "그 정도로 치매 치료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최초의 치매 치료제는 1993년 출시됐다. 메스꺼움과 구토 등 부작용이 문제였지만 1998년부터는 이런 부작용이 없는 약도 개발됐다. 이 약들은 치매 증세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증세가 심해지는 속도를 현저히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최초의 치매 치료제는 1993년 출시됐다. 메스꺼움과 구토 등 부작용이 문제였지만 1998년부터는 이런 부작용이 없는 약도 개발됐다. 이 약들은 치매 증세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증세가 심해지는 속도를 현저히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김희진 한양대
의대 교수는 "아직 치매를 완치할 수는 없지만 조금 불편함을 느끼면서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건 가능하다"며 "아무 기억도
없이 요양 시설에만 머물게 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치매 관련 약 역시 치매 초기 단계에서부터 꾸준히 사용할 경우 가족을 못
알아보는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치매라는 걸 알게 된 후 절망하다 금방 가족이나 친구를
못 알아보게 되고, 또 며칠 지나면 대·소변까지 못 가리게 되는 치매 환자는 드라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라며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치매 완전 정복'의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기웅 센터장은 "이르면 3년 안에 치매 백신이 시판될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전체 치매 환자 중 71.3%가 알츠하이머 치매인데, 이 알츠하이머 치매를 일으키는 물질인 베타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백신의 임상시험이 이미 종료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중간 분석 결과 발표에서는 임상시험에서 백신이 치매 예방과 치료에 상당한 효과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치매 치료의 최종 목표는 평생 한두 번의 주사만 맞으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백신뿐만 아니라 줄기세포를 활용한 치매 치료법 등 다양한 시도가 있기 때문에 치매 치료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관건은 치매의 조기 발견 여부"라고 말한다. 탁월한 효능을 가진 치료제가 개발돼도 치매 증세가 있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39%. 57만6000여명의 치매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치매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이 중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인 28만여명은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김희진 교수는 "올해 초 만난 한 60대 치매 환자는 2009년부터 치매 증세가 시작됐지만 환자 본인과 가족 모두 치매를 의심하지 않았다"며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기억이 거의 사라져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가 일찍 시작됐다면 현재 상태와는 전혀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많은 사람의 치매에 대한 의식 수준이 치료약이 없던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며 "치매는 아는 만큼 보이는데 조기 발견하려면 치매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센터장은 "치매는 어차피 못 고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치매 증세를 외면하다 뒤늦게 병원에 온 후에도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본지와 설문 조사기관 미디어리서치가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족 중 치매 환자가 생긴다면 누가 돌보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에 61.9%가 전문 의료진 또는 간병인·요양보호사라고 답했다. 치매에 걸리면 치료보다 요양원부터 알아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결과다. 김 센터장은 "탁월한 효능의 치매 치료제가 나왔을 때 꾸준한 치료를 받은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의 앞날은 판이하게 다를 것"이라며 "치매도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닌 만큼 증세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조기 발견과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치매 완전 정복'의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기웅 센터장은 "이르면 3년 안에 치매 백신이 시판될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전체 치매 환자 중 71.3%가 알츠하이머 치매인데, 이 알츠하이머 치매를 일으키는 물질인 베타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백신의 임상시험이 이미 종료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중간 분석 결과 발표에서는 임상시험에서 백신이 치매 예방과 치료에 상당한 효과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치매 치료의 최종 목표는 평생 한두 번의 주사만 맞으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백신뿐만 아니라 줄기세포를 활용한 치매 치료법 등 다양한 시도가 있기 때문에 치매 치료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관건은 치매의 조기 발견 여부"라고 말한다. 탁월한 효능을 가진 치료제가 개발돼도 치매 증세가 있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39%. 57만6000여명의 치매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치매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이 중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인 28만여명은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김희진 교수는 "올해 초 만난 한 60대 치매 환자는 2009년부터 치매 증세가 시작됐지만 환자 본인과 가족 모두 치매를 의심하지 않았다"며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기억이 거의 사라져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가 일찍 시작됐다면 현재 상태와는 전혀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많은 사람의 치매에 대한 의식 수준이 치료약이 없던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며 "치매는 아는 만큼 보이는데 조기 발견하려면 치매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센터장은 "치매는 어차피 못 고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치매 증세를 외면하다 뒤늦게 병원에 온 후에도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본지와 설문 조사기관 미디어리서치가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족 중 치매 환자가 생긴다면 누가 돌보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에 61.9%가 전문 의료진 또는 간병인·요양보호사라고 답했다. 치매에 걸리면 치료보다 요양원부터 알아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결과다. 김 센터장은 "탁월한 효능의 치매 치료제가 나왔을 때 꾸준한 치료를 받은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의 앞날은 판이하게 다를 것"이라며 "치매도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닌 만큼 증세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조기 발견과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노인요양병원협회장을 지낸 창원 희연병원 김덕진 이사장은 "평소 치매를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하는 것은 유명인이든 일반인이든, 노년층이든 중장년층이든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통 과제"라고 말했다.
대표적 노인 질환이었던 치매는 최근 젊은 연령층에서도 급증하고 있다. 스트레스 등 각종 원인에 따라 30~50대에서도 치매 환자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작년 11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6년 4055명이던 30~50대 치매 환자는 5년 뒤인 2011년 7768명으로 91%나 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50대 치매 환자 수는 2006년 3179명에서 2011년 두 배 이상인 6547명으로 급증했다.
분당서울대병원 김태희 교수는 "치매는 젊은 층도 안심할 수 없다"며 "지금껏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다뤘던 이른바 '젊은 치매'가 앞으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만큼 늘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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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빨라지는 '치매 시계'… 호주 크리스틴씨의 치매 극복기
자주 책 읽고 퍼즐 맞추기 계속해 의사소통 전혀 지장
없어
일기장에 1주일치 일정 적어두고 수시로 보면서 계획 세워
컴퓨터 자주 이용하고 개·고양이 키우며 정서적으로 안정
재혼한
남편·세 딸들의 헌신도 큰 힘… 책 쓰고 강연까지
올해로 18년째
"치매와 함께 여행한다"고 말하는 호주 여성이 있다. 1995년 치매 진단을 받은 크리스틴 브라이든(여·64)이다.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호주 과학기술부 제1차관보였다. 치매를 앓으면서도 1998년 투병기를 담은 책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펴냈다. 이후 크리스틴은 호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치매를 주제로 강연하며 치매 환자들의 희망이 됐다.
지난 2월 본지 취재팀은 호주 브리즈번에 있는 크리스틴의 집에서 그와 그의 남편 폴을 만났다. 4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크리스틴의 친구 웬디 크루델(51)도 함께했다. 크리스틴과 웬디는 함께 점심을 준비했다. 오븐에서 빵과 파이를 데우고, 치즈를 접시에 옮겨 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지난 2월 본지 취재팀은 호주 브리즈번에 있는 크리스틴의 집에서 그와 그의 남편 폴을 만났다. 4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크리스틴의 친구 웬디 크루델(51)도 함께했다. 크리스틴과 웬디는 함께 점심을 준비했다. 오븐에서 빵과 파이를 데우고, 치즈를 접시에 옮겨 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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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호주 브리즈번에서 ‘치매 환자’ 크리스틴 브라이든과 그의 남편 폴이 인터뷰를 마친 뒤 주먹 쥔 손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감혜림 기자
크리스틴은 46세 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그는 지능지수(IQ) 150에 유명 대학 MBA 출신의 고위 관리였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매일 10시간 넘게 일하면서 야근이 잦았고, 가정 폭력이 심했던 전 남편과는 이혼해 딸 셋을 혼자 키웠다. 크리스틴은 '머리가 안개로 가득 찬 것' 같은 두통과 건망증이 3년간 계속되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전형적인 알츠하이머 증세"라며 "통상 치매 진단을 받은 지 8년 내에 사망한다"고 했다.
"일을 그만두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그는 진단 6개월 만에 사직했다. "처음엔 치매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차라리 암이길 바랄 정도였다"고 말했다. 크리스틴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어린 시절 팔이 부러진 추억을 얘기하던 딸이 "그때 몇 살이었지?"라고 묻자 "네 시 반이었어"라고 답했다. 단어가 생각 안 날 때는 다른 단어를 열거하거나 몸짓으로 설명했다. '우편함' 대신 '우표를 붙인 편지가 들어가 있는 상자'라고 말하는 식이다. 짜증도 부쩍 늘었다. 가끔 이유 없이 눈물도 흘렸다.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이웃집의 요란한 파티 때문에 시끄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크리스틴은 "그때 그동안 일이 바빠 제대로 해주지 못한 엄마 역할을 치매 때문에 영원히 해주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딸들은 크리스틴이 '치매와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돼줬다. 딸들은 "함께 치매를 이겨내자"며 크리스틴을 위로했다. 집안일을 도우며 매번 엄마 약을 챙겼고, 엄마와 자주 외출하면서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크리스틴은 '딸들과 행복한 노년'을 위해 치매와 맞서기로 했다. 일기장에 일주일치 일정을 미리 적어두고, 수시로 열어보면서 계획을 세웠다. 제때 약을 먹기 위해 알람을 맞춰놓고,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훈련했다. 치매 진단 3년 후 소개팅으로 폴을 만나 재혼했다. 폴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자, 폴은 "우리 아버지도 치매였다"며 개의치 않았다. 폴은 아내를 무조건 돕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크리스틴은 컴퓨터도 곧잘 다룬다. 이메일을 직접 확인하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답장도 보낸다. "치매 환자는 최근 기억을 잘 잊는 편인데, 컴퓨터 자판은 누르기만 하면 글자가 적히고 맞춤법 검사도 돼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최근엔 태블릿 PC를 자주 이용한다. 부부는 개 한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이들은 "개나 고양이를 만지면 안정감이 생기고 뇌도 쉴 수 있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크리스틴과 폴은 치매 환자를 위한 활동에도 나섰다. 2001년부터 뉴질랜드·캐나다·일본·한국 등 7개국을 찾아 강연했다. 크리스틴은 2003년 최초의 치매 환자 출신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 이사로 선출됐고, 치매 환자 지지 모임도 만들었다. 폴과 결혼 생활을 담은 두 번째 책을 낸 크리스틴은 요즘 세 번째 책을 쓰고 있다.
-어떤 사람이 치매 잘 걸리나
3대 특징은 저학력·문맹·고령… 비만 중년층도 6배 이상 높아
전문가들은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높은 이들의 특성으로 저(低)학력·문맹(文盲)·고령(高齡) 등을 꼽는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뇌세포의 수가 줄어들고, 저학력자와 문맹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뇌를 쓰는 빈도가 낮아 치매의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다. 분당 서울대병원 김태희 교수는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뇌 예비 용량이 늘어나 뇌세포 간의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이뤄진다"며 "뇌세포 일부가 죽어도 다른 뇌세포에서 죽은 뇌세포의 역할을 대신해 치매로 이어지는 뇌 기능 저하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부모 중에 치매 환자가 있는 경우 치매의 위험성이 2~4배 높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만병의 근원으로 꼽히는 비만도 치매의 위험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웨덴 노인신경과협회는 지난 달 비만인 중년층은 정상 체중인 사람에 비해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6배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비만을 비롯해 고지혈증·고혈압·당뇨 등의 질병은 뇌의 혈류 순환을 막아 뇌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며 "이 때문에 이 같은 질병을 앓는 환자들은 정상인들보다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1.5배 정도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생활 습관과 성격도 치매의 위험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만성적인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치매의 위험도가 2배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김 교수는 "우울증 치료를 제때 받지 않아 우울증의 재발 빈도가 높아질 경우 치매의 위험성도 비례해서 올라간다"며 "성격이 내성적인 사람들이 스트레스 관리를 잘하지 못해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높다는 보고도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전문가들은 하루 평균 3잔 이상의 술을 마시는 음주 습관을 갖고 있거나 뇌진탕 등으로 10분 이상 정신을 잃은 적이 있는 사람들도 뇌 손상으로 인해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 교수는 "연구 결과를 놓고 거꾸로 생각해 보면 결국 몸과 머리를 많이 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치매의 위험성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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