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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시각장애 법관 최영 판사 재판 모습 첫 공개

하마사 2012. 5. 12. 07:30

공개이어폰 끼고 재판자료 청취… 소리로 세상을 보다

국내 최초 시각장애 법관 최영 판사 재판 모습 첫 공개
실무관이 만든 한글파일 음성변환 장비로 듣고 또 들어 대부분 외우고 재판 들어가
방청객 "다른 판사와 똑같아"… 최 판사 "법원도 나도 변화중"

사법사상 첫 시각장애인 판사로 지난 2월 임명장을 받은 서울 북부지법 최영(32·연수원 41기) 판사가 10일 오전 10시 북부지법 701호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법복(法服)을 차려입은 최 판사는 동료 김대규 판사의 팔을 잡고 법정에 들어섰다. 재판장인 정성태 부장판사와 김 판사의 자리에는 서류가 가득 쌓여있었지만, 최 판사의 자리에는 노트북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최 판사는 익숙한 듯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컴퓨터에 연결하면서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USB에는 주요 소송기록을 음성파일로 전환시켜 놓은 자료들이 담겨 있다.

재판장인 정 부장판사가 "사건번호 2011가합×××"이라고 사건 번호를 부르자, 서류를 뒤적이는 김 판사와 달리 최 판사는 노트북을 두드렸다. 한쪽 귀로는 원고와 피고 측 소송 대리인의 공방을 들으면서, 다른 한쪽 귀로는 그때그때 필요한 소송 자료를 찾아내 듣는 방식이다. 소송 대리인들이 변론을 할 땐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며 노트북에 기록하기도 했다.

이날 북부지법은 시각장애인인 최 판사가 참여한 주유소 임대차 계약 관련 사건 등 5건의 민사소송 공판을 10여분 동안 언론에 공개했다. 재판부는 방송 카메라의 법정 안 촬영도 허용했다. 시각장애인 판사의 업무수행 능력에 대한 재판 당사자와 국민의 우려를 씻기 위한 차원이라고 법원 측은 설명했다.

시각장애인 최영 판사가 11일 오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이어폰을 통해 소송기록을 들으면서 공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최 판사는 이날 입·퇴정할 때 동료 판사의 도움을 받고, 서류와 볼펜 대신 컴퓨터와 이어폰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일반 법정과 다른 점은 없었다. 재판 중간 중간에 재판장과 의견을 나누는 모습도 여느 법정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재판을 지켜본 한 방청객은 "시각장애인 판사가 재판한다고 기자들이 잔뜩 온 거 같은데, 다른 판사들과 뭐가 다른지 거의 못 느꼈다"고 했다.

순조로운 재판 진행에 대해 북부지법 이창열 공보판사는 "최 판사가 다른 판사들보다 재판 준비에 쓰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 판사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심야시간까지 음성전환 프로그램이 내장된 컴퓨터와 스피커가 설치된 판사지원실에서 매주 금요일에 있는 재판을 준비한다.

여기에 최 판사를 위해 특별히 배치된 실무관 최선희(30)씨가 소송기록을 일일이 읽고, 그중 최 판사가 요청하는 부분을 한글파일로 만드는 일을 해준다. 증거사진 등 이미지는 최 실무관이 세세히 말로 설명한다. 최 판사와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최 실무관은 "최 판사가 장애를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온 것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에 또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 판사는 최 실무관이 만든 한글파일을 음성변환 장비를 이용해 듣고 또 듣는다. 이 공보판사는 "최 판사가 음성파일로 변환한 소송기록을 대부분 외우고 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시력이 점차 악화되는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아 현재 1급 시각장애인인 최 판사는 이날 재판이 끝난 뒤 두 달 남짓 경험한 판사 생활의 소회를 밝혔다.

"판사가 되기 전에 있던 법원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판사로서의 무게감과 책임감이 또 다른 두려움으로 다가오네요. 법원이 저를 위해 변했던 것처럼 저도 열심히 해서 그 두려움을 없애겠습니다."

법원 관계자는 "시각적인 자료가 주요한 증거로 작용하는 재판의 경우 초임인 최 판사를 배려해 주심을 바꿀 수도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2/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