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 정권 거치며 서울시장 2번, 총리 2번,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公職의 표상' 고건
'Mr. 클린'의 일갈
"고위공직자는 물러나도 公人이다 차관하다 로펌갔다 장관… 말 되나"
◇"공직자의 영혼은 공인의식이다."
―요즘 맡고 계신 자리는?
"사회통합위원장은 지난해 말 물러났고 지금은 기후변화센터 명예이사장이 전부다."
―내무관료로 출발해 서울시장 두 번, 총리 두 번을 지내고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했으니 공직의 모든 것을 섭렵한 셈이다. 공직 혹은 공인이란 무엇인가?
- 서울 연지동 사무실에서 '공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고 전 총리는“공직자에게는 명예가 있다. 그래서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내가 1980년 5월 17일 청와대 정무수석 사표를 내고 20년 공직생활을 마감한 이후 31년이 흘렀는데 그후 장관 시장 총리로 보낸 기간은 12년이다. 나머지 19년은 백수로 지냈는데 그 기간에도 공인으로 살았다. 고위공직자는 물러나도 공인이라는 게 내 철학이다."
―물러나도 공인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요즘은 차관하다가 로펌이나 관련기업에서 거액을 받고 있다가 다시 장관이 되곤한다. 적어도 공인의식이 있다면 그런 자리에 가질 말든가, 갔다면 다시는 공직으로 돌아와서는 안된다. 그것이 공인의식이다."
―일부에서는 고 전 총리께서 8개정권에 걸쳐 공직을 맡았다는 점에서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말의 대표사례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정치와 행정은 다르다. 공직자의 영혼은 특정정권과 관계없이 철저한 공인의식, 국민에 대한 성실한 봉사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다. 나의 경우 정권이 부른다고 무조건 달려가지 않았다. 내가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는지를 판단해 결정을 했다. 예를 들어 2002년 서울시장 임기가 끝나갈 때 민주당에서는 나의 재출마를 강압했다. 그러나 관선 시장 때 해놓은 일들을 마무리지었기 때문에 미련없이 물러났다."
―그때 재출마했으면 이명박 후보와 서울시장을 놓고 한판 했을 텐데
"글쎄, 당시 내 지지도가 크게 앞서 있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안 나오지 않았을까."
인터뷰 주제를 공인의식과 부패로 한정시키기로 한 약속이 생각난 듯 고 전 총리는 서울시장 퇴임 직후 일화를 털어놓았다.
- 국토개발연구원 고문 시절 남산이 보여 사무실에 남산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고 전 총리는 연지동 사무실로 옮긴 후에도 액자를 걸어놓고 있다. / 이태경 기자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 직접 연락해 상임고문으로 모시겠다고 제안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어렵겠다고 고사했다. 공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상임고문으로 오라고 하겠나. 잠실 롯데타운 건축허가만 해도 내가 상임고문으로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압박로비가 되지 않겠나."
그래서 80년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20년 동안 그가 맡은 직책을 조사해보았다. 국토개발원 고문,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공동상임의장, 명지대총장, 새시대포럼 공동대표,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반(反)부패국민연대 회장, 에코포럼 공동대표,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그중 서울시장 퇴임 직후인 2002년 8월 맡은 것이 반부패국민연대 회장이었다.
"뭘 바라서가 아니라 그동안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이 크니 사회봉사를 위해 이런저런 자리를 맡았는데 대부분 환경운동이나 부패추방운동이지. 둘 다 '클린'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니까."
―공직과 기업의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시급한 현안이다.
"나의 경우 기업을 멀리하지는 않았지만 공직에 있었던 관성으로 기업인들과 거리를 두려 노력했다."
◇"애국자가 되려고 정치학과에 갔다."
- 서울 연지동 사무실에서 ‘공직자’와 ‘공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고 전 총리는 “공직자에게는 메리트와 명예가 있다. 그래서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훗날 '경이와 건이'라는 제목으로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수필에서 이양하는 건이를 "아주 공리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교수와 고 교수의 대화에 두 아이가 끼어들자 경이와 건이의 어머니는 사탕을 줄 테니 건넌방으로 오라고 말한다. 호기심 많은 경이는 계속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려 하지만 건이는 사탕을 받고 다시 돌아와 어른들을 귀찮게 구는 것을 보고 붙여준 이름이다. 그 '아주 공리주의자' 건이가 먼 훗날 대한민국의 총리를 두 번이나 지내게 되는 고건이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갔다는 것은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광복이 되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승만 김구 선생 등이 속속 귀국했다. 그때 사람들은 그분들을 독립운동가라고 하지 않고 '애국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크면 애국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구 선생의 장례식도 어렸지만 가서 구경했고 중학생 때는 '백범일지'도 읽으면서 애국자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웠던 것 같다."
―게다가 직선으로 서울대 문리대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던데.
"대학 들어갈 때 목표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장차 정치를 하기 위한 디딤돌로 학생회장을 해봐야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멋지게 연애하는 것, 셋째는 고시합격이었다."
―1960년 4·19 때는 뭐하고 있었나.
"그해 2월 28일 졸업하고 학교도서관에서 고시공부하면서 후배들 데모하는 것 격려했지. 당시 정치학과 대표 윤식과 4.19 선언문을 쓴 이수정(전 문화부장관)이 친한 후배였다. 데모 끝나고 나면 후배들 데리고 학교 근처 대폿집 '쌍과부집'에 가서 통음하곤 했지."
―고시는 1961년에 합격했던데.
"1960년 시험에서는 낙방했다. 내 인생에 처음 고배를 마신 거지. 실은 당연히 합격할 줄 알고 결혼까지 해버렸는데. 공부가 부족하면 자기가 잘 봤는지 못봤는지도 모른다. 하하. 그래서 해산물 수출을 하던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공부를 해 이듬해 5.16 직후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탄탄대로를 달렸나.
“정반대다. 전북대총장을 지낸 선친께서 5.16 직후 군정(軍政)반대를 위해 김병로와 윤보선이 주도한 민정당(民政黨)에 입당해 정책위원장을 맡아 군정반대 시위강연을 다니신 것이다. 통상 고시합격 후 1년 반이면 보직을 받는데 나는 3년 반이 되도록 보직이 없었다. 그래서 사표를 내려고 했는데 그 이야기가 위에 들어갔는지 겨우 보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때의 어려움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실력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맏형 고석윤은 요직 중의 요직이던 상공부 상역국장으로 있다가 압력을 받고서 공직을 떠나야 했다. 그후 변호사로 개업한 맏형은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가 돼주었다.
―이력서를 보니 관료생활은 주로 내무부에서 했던데.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으로 일했고 1975년부터 79년까지 전라남도지사를 했다.”
―1975년이면 37살에 도지사를 했다는 말인데. 초창기에 탄압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내가 열심히 한 것도 있겠지만 실은 선친의 희생이 있었다. 6대 총선 때 군산 옥구에서 야당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선친은 아들의 앞날을 위해 야당 정치인의 길을 접고 학자의 길로 돌아가셨다. ‘단 한 권의 철학 명저를 남겨야겠다’은 원래의 소망대로 선친은 1969년 ‘선(禪)의 세계’라는 저서를 냈다.”
실제로 이 책은 1999년 한 출판잡지가 선정한 ‘국내 각 분야 지식인 100명이 뽑은 20세기 한국고전’ 중 하나로 뽑혔다.
◇새마을운동으로 맺어진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두 차례 인터뷰에서 특이하게 느낀 점은 고 전 총리의 ‘언어’가 매끈한 선입견과 달리 거침이 없고 서민적이었다는 점이다. 8명의 대통령을 모셨으니 모두에게 깍듯할 법한데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칭할 때만 ‘박 대통령’이라 했고 나머지는 YS(김영삼), DJ(김대중) 등 우리네 어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각별함이 있는 것 같다.
- 지난 16일 서울 연지동 사무실에서 대학로 식당까지 버스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고 전 총리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익숙한 듯 카드를 대고 버스에 탔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좋은 인상을 심었겠다.
“그 때문인지 제1차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막중한 과제가 나에게 떨어졌다. 그것은 원래 농림부가 해야 하지만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던 내무부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그때 박 대통령은 농림부장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농림부는 지금 식량증산 하나에만 전념해도 벅차지요?’라며 내가 맘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다. 그리고 매달 한 번씩 청와대에서 새마을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유일한 안건인 새마을사업 추진상황을 나 혼자 보고했다. 모두 21차례 보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 회의 때마다 박 대통령이 우리 농촌과 국토에 대해 가졌던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빈곤했던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한(恨)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반드시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성장을 이룩하려는 집념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전라남도 지사를 마치고 청와대 행정수석으로 있을 때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겠다.
“1979년 1월 3일부터 10월 26일 돌아가실 때까지 열 달 동안 바로 옆에서 모셨다. 이 시절에는 자주 대통령과 수석비서관들의 만찬이 있었다. 그전에는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때는 육영수 여사께서 돌아가신 뒤 외로우셔서 그랬을 것으로 짐작한다.”
◇집요한 뇌물공세, “거절의 수사학을 공부해야 했다.”
“1975년 전라남도 지사가 되어 각 과를 순시하는데 관광운수과 과장 자리 옆에 빈 책상이 하나 있어. 이게 뭐냐 했더니 그 지역 대표적인 버스회사 직원 자리래. 그래서 알아보니 매년 한 번씩 버스노선을 변경하는데 공무원들이 그 버스회사 직원한테 물어보고서 결정한다는 거야. 당장 내쫓아버렸지. 그랬더니 어느 날 야근하고 있는데 버스회사 사장이 날 찾아왔어. 직원들 야근하는 게 안쓰러워 불고기라도 사주라며 돈봉투를 내밀어. 잠깐 고민하다가 거절하기는 그렇고 해서 ‘고맙습니다. 그 뜻을 정확히 전달하겠습니다’하고는 받았어. 그리고 이튿날 조회 때 그 사실을 공개했더니 직장새마을회에서 기금으로 쓰겠다고 해, 그래서 회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도록 하고 영수증까지 첨부해서 보냈지. 두어 달 후에 서울에서 시도지사 회의가 있어 올라왔는데 그 사장이 점심이나 하자고 해. 외교구락부에서 만났는데 ‘지사님 그걸 공개하시면 어떻합니까? 제가 역대 지사님들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며 이번에는 얇은 봉투를 내밀었어. 그래서 나의 철학이라며 거절하는데도 계속 내미는 거야. 그래도 계속 거절했더니 얼굴이 하얘지더라고. 모욕감을 느꼈던 거지. 나도 당혹스러웠어. 그때부터 거절의 수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지.”
―거절의 수사학?
“한 마디로 상대방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방법을 연구한 거지. 안 그러면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겠더라고. 실제로 뒤에 내가 국회의원 출마했을 때는 후원금이 좀 필요했는데도 아무도 안 갖다주더라고. 그때는 얼마든지 받을 자세가 돼 있었는데 말이야. (웃음) 돈을 가져오는 경우는 크게 보면 두 가지야. 하나는 이권이나 특혜를 부탁하는 청탁성이고 또 하나는 명절 때 떡값봉투나 가벼운 선물을 가져오는 경우지. 청탁성 봉투는 상대방 기분이 상하더라도 단호하게 거절했어. 문제는 떡값봉투인데 처음에는 ‘그 정성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고 해. 그래도 끈덕지게 나오면 ‘마음만 받겠습니다’고 하지. 그런데도 계속 내밀면 ‘지금은 제 판공비만으로 충분합니다. 부족할 때는 제가 요청하겠습니다’고 하면 상대방은 대부분 기분 상하지 않고 봉투를 다시 자기 주머니에 넣지. 이게 거절의 수사학이야.”
―본인의 청렴도 중요하지만 조직의 장은 조직 전반의 부패문제도 잘 관리해야 하는데.
“우리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는데 그것은 절반만 사실이다. 윗물이 맑은 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집요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원위치되는 것이 부패문제다.”
―두 차례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부패의 온상이라는 의미의 ‘복마전(伏魔殿)’이라는 오명을 씻어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줄 수 있나?
“부패척결은 의식개혁과 제도개혁이 함께 가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 관선 시장(1988~1990) 때는 의식개혁에 집중했다. 부임하자마자 시청공무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외부로부터의 이권청탁 압력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되겠다. 대신 여러분들은 원리원칙에 입각해 깨끗하게 처신해달라. 서로 이 약속을 지키자.’ 결국 1990년 나는 청와대와 여권 실력자로부터 한보의 수서불법개발행위를 허용해달라는 강요를 거부하다가 시장직에서 타의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결국 한보비리가 터졌을 때 서울시 공무원은 단 한 사람도 연루되지 않았다.
민선 시장(1998~2002) 때는 ‘부패와의 전면전쟁’을 선포했다.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인물은 썩는다. 그래서 구청의 건축 주택 위생 세무 건설 등 ‘5대 부조리 취약분야’에 근무하는 25개 구청 근무자의 80%가 넘는 4142명을 구청끼리 상호교류하는 시청 사상 최대규모의 인사를 단행했다. 당시는 구청장도 민선이라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협박하다시피 해서 관철시켰다.
그 밖에도 부패방지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터넷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시스템’이다. 강렬한 햇빛만이 최고의 살균제다. 누구나 손바닥보듯이 들여다보기 때문에 뇌물을 받으려야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시장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불러다놓고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 이 오픈시스템은 한국 최초로 해외에 수출된 행정시책이다. 내가 시장 물러날 때 전자결재 비율은 99%였다.
끝으로 부패에 대해서만큼은 일벌백계가 아니라 백벌백계하는 무관용 정책을 자리잡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인사권자가 부패에 대해 관대하면 의식개혁이고 제도개혁이고 무용지물이다.”
―현 정부를 염두에 둔 지적인가.
“알아서 판단해라. 공직의식뿐만 아니라 부패문제도 과거에 비해 많이 악화되고 있다. 특히 부패의 경우 흐름이 중요한데 한동안 부패가 줄어드는 흐름이었는데 요즘 와서는 정반대로 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사람들은 그 흐름을 민감하게 지켜보고 있다. 거기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청렴 무능한 부하와 부패 유능한 부하 둘 중에 누구를 쓰겠는가?
“전자는 이권이 관련된 루틴한 업무에, 후자는 이권이 없는 새롭고 어려운 과제를 맡기면 된다. 수서특혜 당시 압력의 하나로 도시계획국장을 잡아넣는 바람에 새롭게 인선을 해야 했다. 수소문 끝에 기술직 중에서 깨끗한 사람을 찾았는데 김학재 당시 부이사관이 물망에 올랐다. 추천한 사람에게 깨끗하냐고 물었더니 깨끗하다고 했다. 두 번째는 의지가 강하냐고 물었더니 암벽등반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뽑았다.”
- 1978년 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라남도를 방문해 고건 전 총리(당시 전라남도 도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 조선일보사
―오랫동안 사람을 써왔다. 경험상으로 우리 공직자 열 명 중 청렴하면서도 유능한 사람은 몇 명으로 보나?
“한 명. 지금까지 깨끗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미래에도 깨끗할 수 있는지까지 봐야 한다. 퇴직 준비나 하는 사람은 안 된다.”
◇“공직생활 중 세 번의 위기가 있었다.”
―오랜 공직 생활 중 위기가 많았을 텐데.
“첫째는 1980년 5월 17일 청와대 정무수석 사표 냈을 때다. 전국으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한다고 했다. 그것은 헌정(憲政)을 포기하고 군정(軍政)으로 간다는 말이다. 미련없이 사표를 냈다. 최규하 대통령이 ‘끙’하면서 야속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두려웠다. 기세등등한 군부가 나의 사표제출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스러웠다. 신변의 위협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때였다. 그러나 전남도지사 끝내고 올라오면서 전별금도 받지 않을 만큼 흠결없이 처신했기 때문에 당당하게 처신하자고 마음먹었다.
둘째는 앞서 말한 수서압력 때다. 청와대 말을 안 들으니 당시 법무부장관이 검찰국장을 보냈더라. 새로 임명한 도시계획국장도 잡아넣겠다는 거다. 그래서 차라리 날 잡아넣으라 했다. 결국 그해 12월에 시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셋째는 2004년 대통령 탄핵이 의결돼 권한대행을 맡았을 때다. 그때 북한 용천에서 폭발사고가 났는데 김정일이 연루됐는지 여부가 가려지지 않는 거다. 온갖 걱정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데 1980년 5월 17일 사표를 내고 그해 9월 교통부장관을 맡지 않았나.
“사표를 낼 때 최 대통령이 하도 만류해서 그러면 연구기관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국토개발연구원 고문이라는 자리를 얻어 가 있었다. 그런데 고명승 당시 보안사령관이 찾아왔다. 고향도 같은 전북이고 같은 성씨라 보낸 것 같은데 국보위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중하게 사양했다. 나라가 어려운 것은 알지만 나는 행정밖에 모른다고 했다. 그랬는데 8월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김경원 비서실장이 전화가 와서 ‘행정은 안다고 하지 않았냐’며 장관을 맡으라고 했다. 일단 헌정이 복원됐기 때문에 참여했다. 나는 출신이 행정이라 다시 행정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출신이 재야였으면 나도 재야운동했겠지.”
―80년 광주의 비극에 대해 일종의 부담 같은 것은 없나.
“왜 없겠나. 얼마 전까지 거기서 4년간 도지사를 했는데. 광주의 비극은 내가 정무수석 사표 낸 다음날부터 시작됐는데 보도가 통제돼 나도 잘 몰랐다. 다음날 집에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신이 청와대에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하셔서 나도 울먹이며 ‘저는 사표를 내서 지금은 민간인입니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었다.”
고 전 총리는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전국구의원이나 서울시장으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일화도 들려주었다. 두 사람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지극히 사무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는 없나.
“없다.”
―노무현 정권의 초대 총리가 됐다.
“선거 직후 노 당선자는 제주도에 갔다. 그때 신계륜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신 실장은 내가 민선 서울시장 할 때 부시장으로 데리고 있어 잘 안다. 선거 끝난 지 몇일 되지도 않았는데 당선자의 뜻이라며 초대총리를 맡아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그러면 당선자가 내일 서울로 올라와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해서 일단 만나는 보자고 해서 신라호텔에서 세 사람이 만났다. 난 더 좋은 사람 찾아보라고 했고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러갔나 어느 날 조선일보 1면에 내가 초대총리가 될 것이라고 크게 났더라고.”
- 고건 전 총리가 2004년 3월 13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첫 번째 공식일정인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청와대 사진기자단
“내가 총리를 물러나기로 확정 발표된 후에 신임장관 제청을 해달라고 하길래 못하겠다고 했지. 끝까지 안해줬더니 나한테 감정이 있었는지 뭐라 나중에 한 마디 하데.”
―안철수 신드롬이 한창이다. 한때 본인도 새로운 정치의 기대주로 꼽힌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노통이 한마디 해서 내가 뜻을 접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 실제로 새로운 대안정치를 해보려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독자정치세력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더라고. 그렇다고 기존정당에 들어가 구태정치하기는 싫고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좋은 것 같아. 그때는 보수·영남의 잃어버린 10년이 위력을 발휘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
―안철수 신드롬이 박찬종 신드롬처럼 거품이 될 거라는 시각도 있는데.
“안철수는 진정성과 순수성이 있고 무엇보다 이미 사회에 공헌을 했다. 안철수 백신, 인터넷 쓰는 사람치고 안 쓴 사람이 없잖아. 문제는 정치권력화 과정인데 그건 워낙 어렵고 복잡하니 지켜봐야겠지.”
―두 차례 서울시장을 하면서 한강치수에도 일가견이 있다. 4대강이나 경인운하는 어떻게 보나.
“4대강은 필요는 한데 이 시점에 그 많은 돈을 한꺼번에 들였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경인운하는 내가 시장으로 있을 때 한 연구소에서 용역보고를 해 왔는데 나는 반대했다. 17km밖에 안 되는 곳에 운하를 만드는 것은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만일 지금 서울시장을 다시 맡는다면 무슨 일부터 하겠는가?
“도시의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완성됐으니 나머지는 시장(市場)에 맡기면 되고. 10만 가구쯤 되는 반지하 생활자들을 지상으로 올라와 살 수 있도록 하는 주택정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복지전달체계를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개편해서 피부에 와닿는 복지로 전환해야 한다.”
―회고록 준비는 안하나.
“자료는 모으고 있다.”
-조선일보, 201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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