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왔어!꼭 온다고 했잖아"
6·25때 헤어진 남매는 스튜디오에서 30년만에 만나 통곡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진실만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나의 방송 생활을 되돌아보면 방송만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준 일 하나를 잊을 수 없다. 3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모든 순간과 대화가 다 또렷이 기억난다.
1970년대 중반 나는 라디오 PD로 일했다. 그때 6개월 동안 흘러간 노래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맡은 적이 있다. 나는 그 프로에서 신청곡과 사연을 받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 레퍼토리가 한정돼 있긴 했지만 그런대로 엽서도 오고 사연도 날아왔다. 어느 날, 6·25 때 헤어진 여동생을 찾는다는 엽서가 왔다. 1980년대 초반 이산가족찾기운동이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키기 전이었다. 우리는 그냥 의례적으로 사연을 읽어주었다. 그런데 여동생이라고 자처하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남자를 불러 스튜디오에 대기시켜 놓은 다음 나중에 온 여자를 스튜디오로 들여보냈다. 여자는 약간 다리를 절면서 스튜디오에 들어오더니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엉거주춤 서 있던 남자도 여자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갑자기 여자의 등 뒤로 돌아가 원피스 자락을 들어올렸다. 놀란 여자가 엉거주춤 돌면서 원피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여자의 오른쪽 다리 오금에 상처 같은 것이 보였다.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며 와락 여자를 끌어안았다.
"희야, 희야구나!"
"오빠 맞아! 응, 우리 오빠 맞아!" 여자가 울부짖었다.
"그래, 그래 희야, 내가… 내가, 네 오빠다!" 여자가 무너졌다. 둘은 스튜디오 바닥에 주저앉아 부둥켜안았다.
"왜! 안 왔어? 왜! 그때 다시 온다고 했잖아!" 여자는 오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통곡을 했다. 원망과 서러움에 복받친 울음은 비명에 가까웠다.
6·25 와중에 남매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다 엄마를 잃었다.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엄마는 피를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남매는 엄마를 흔들며 울었다. 엄마가 말했다.
"너희 둘은 절대로 손을 놓지 마라. 헤어지면 안 된다. 이 넓은 세상에 떨어지면 못 산다. 외로워서도 못 산다. 둘이 손 꼭 잡고 살아라. 철아! 동생 먼저 챙겨라. 어서, 어서 가거라. 어서! 저 멀리 도망가거라. 빨리 가거라! 어서!"
엄마는 이미 말이 없었다. 둘은 정처 없이 떠밀려오다가 동생이 오른쪽 다리에 유탄을 맞았다. 피 흘리며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어린 동생을 힘겹게 둘러업고 근근이 강원도 고성 근처 어느 집에 정착했다.
다리 상처가 나은 얼마 후 오빠는 그 집에 남고 동생은 또 다른 집으로 가야 했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쳐봤지만 어린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이었다. 그해 가을, 오빠가 살던 집에 잔치가 있었다. 오빠는 떡을 싸들고 한나절을 걸어 동생이 살러간 집을 찾아갔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동생은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오금의 상처 때문에 절뚝거리며 물동이의 물을 반이나 흘렸다. 정수리의 머리는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예쁘고 귀엽던 7살의 어리고 어리던 동생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빠 역시 10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동생이 너무 불쌍해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더위에 이미 반이나 쉬어버린 떡을 울먹거리며 동생에게 먹이며 또 올 거라고 했다. 1·4 후퇴가 시작되면서 오빠는 동생을 찾으러 살던 집을 떠났다. 동시에 동생은 오빠를 찾으러 오면서 수많은 피란민 속에서 길이 엇갈려 버렸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렸다. 오빠가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오빠는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지만 여동생의 팔뚝은 남자처럼 굵었고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검붉었다. 몸 전체에 노동의 피로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동생이 말했다.
"나는 오빠가 날 버린 줄 알았다. 많이 원망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너를 찾으려고 고성 근처를 수도 없이 갔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오빠는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여동생을 꼭 안고 흐느끼며 눈물만 흘렸다.
오빠는 "어머니 말을 잊을 수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생 먼저 챙기라고 한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이라고 말을 맺지 못했다.
"전쟁 때 오빠 무릎 베고 누워서 하늘에 수도 없이 터지는 불꽃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어. 지금이 그때의 안락한 기분 그대로야. 오빠가 옆에 있어서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
흔히 운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그들 인생에서 그런 재난이 없었다면 그들은 귀한 아들·딸로 자라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지난(至難)한 세월을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그들의 설움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들 남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 나는 알았다. 진실만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드라마 제작을 해 오면서 이런 아름다운 진실만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시청률을 위해, 혹은 허명(虛名)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진실하도록, 진정으로 진실하도록 노력했다.
-2010/2/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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