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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기독교 박해

하마사 2009. 5. 23. 09:45

로마의 기독교 박해

초기 기독교는 모진 박해의 파고를 헤치고 살아남았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의 밀란칙령과 데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인  1-3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신, 임박한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강인한 믿음과 대속의 주(Lord)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역시 "진실로 그 분은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신앙은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a)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

 

1.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앙에 바탕을 둔 다신교였습니다.
원칙적으로 로마의 종교정책은 각 지역의 고유 종교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로마에는 각지에서 유래한 온갖 종류의 신전들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헬라와 페르시아 등의 동방에서 유래한 온갖 밀교들이 성행했고 그 신들에 대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제1계명을 이유로 그 신들에 대한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온갖 신들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매도되었습니다.


2. 신격화된 황제에게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종류의 신들 중 로마의 황제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마땅히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시에 황제는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인 황제였습니다.
누구든 유일한 황제와 황제의 나라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였음은 물론, 재림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고 예수를 만 왕의 왕이라 믿었습니다.

황제도 예수의 나라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시민권이 로마에 있지 않고 장차 도래할 예수의 나라에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를 전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는 음모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적 모반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반 사회적이고 부도덕한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 등으로 감시와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내 놓고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택한 장소는 자연히 은밀한 장소로 로마인들이 꺼리는 지하무덤인 카타콤베였습니다.
카타콤베으로 숨어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음해는 그리스도인들이 무덤 속의 시체를 먹는다는 것과

은밀한 곳에서 남녀가 혼음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b) 카타콤베
 

카타콤베 (Catacombe)

 

카타콤베(Catacombe)는 초기 기독교 인들의 모였던 지하 공동묘지를 지칭합니다.
고대 로마의 법에 묘지는 성벽 밖에 쓰도록 되어 있었고, 로마 귀족들은 성벽 밖에 성을 지어 묘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빈민계급이었던 기독교인들은 귀족들의 풍습을 따를 수 없어 그들만의 묘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폐광이 된 골재 채석장이라든가, 호의적인 독지가의 지하 가족묘지에 조상들을 묻게 됩니다

여기에는 돌무덤에 묻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기독교 박해 때에 중요한 피신처가 됩니다
묘지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로마법을 이용하여 지하 공동묘지에 숨게 됩니다.
이곳에 피신한 신자들은 함께 모이게 되고 예배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후에는 로마 군병들이 이 곳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군병들 중에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전도되어 신자가 되고 동료 군병으로부터 순교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로마 주위에는 약 30개의 카타콤베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