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행복과 희망

[2008 겨울 희망편지] [11] 어머니가 남긴 '꼬깃꼬깃 3만원'

하마사 2008. 12. 31. 11:48

 

[2008 겨울 희망편지] [11] 어머니가 남긴 '꼬깃꼬깃 3만원'

 

가출이후 온갖 일 30년 일기쓰며 '문학 꿈' 키워

속된 욕심에 연연않는건 기뻐해줄 어머니 안계셔…

 

신동근·시인

 

고등학교 입학 두 달 뒤 어느날, 나는 가출을 해 고향인 문경을 떠났다. 그후 10대에는 주로 공장생활을, 20대에는 초상화 제작, 30대와 40대 중반까지는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목공, 미장, 도배, 페인트칠, 삽질, 벌초, 외판, 광부, 리어카행상 등등 수십 가지 일을 전전하며 30년이 흘렀다.

16세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18세 때부터 일기를 썼다. 내 일기장은 나날의 일상과 더불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자신에 대한 자괴와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한번에 5장, 10장씩 쓰다보니 한 달이 채 못 돼 노트 한권이 꽉 찼다. 월세 쪽방에서 자꾸만 늘어나는 일기장은 짐이 되었다. 30대를 코앞에 두고 나는 10년간 써온 일기장을 몽땅 불태우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용을 추리고 추려 대학노트 20권으로 줄였다. 그 작업이 6개월 걸렸다.


그 기간에 나는 수입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 문화센터를 찾아가 시와 소설 창작을 수강하느라 군 복무 후 5년간 저축한 600만원도 모두 써버렸다. 원래는 일기장 정리를 위해 문장 공부를 시작한 것인데 강의를 듣다보니 문학에 대한 욕망이 싹텄다. 틈틈이 시간을 내 강좌를 계속 수강했다. 몰아서 합치면 4년 정도의 기간을 꼬박 채웠을 것이다. 38세 때 중앙 문예지에 투고한 나의 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만기 채운 적금을 수령할 때보다 더 보람을 느꼈다. 그후 4년이 지난 2002년 겨울에 나는 첫 시집을 발간했다. 비로소 견고한 나만의 성을 하나 구축한 것처럼 가슴이 뿌듯했다.

1984년 이후 나는 파주에 산다. 1988년 6월 하순에 어머니가 다녀가셨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머니와 나는 긴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나는 그때의 긴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쓴다. 물론 전업으로 쓸 처지는 못된다. 일류 기술자는 아니지만 용접기능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한다. 어머니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배웅하고 돌아온 나는 그날 밤 조용히 눈물 흘리며 미숫가루를 타먹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가 인근 방앗간에 가서 한 양동이 구해온 것이다. 미숫가루 몇 숟가락을 떠내다가 내 손은 전기에 감전된 듯 굳어버렸다. 꼬깃꼬깃 접은 지폐 3만원이 푹 파묻혀 있었다. 그 돈은 내가 "차비로 쓰세요" 하고 어머니에게 건넸던 것이었다.

내가 조급하게 굴거나 베스트셀러 집필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은, 재능도 물론 미비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시인이며 소설가인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해줄 어머니가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와 소설을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지갑 속 지폐 3만원과 더불어 어머니가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쉬기 때문일 것이다.

2009년이면 49세가 되는 내가 아직도 미혼이라니, 동년배와 비교하면 나는 분명 사회생활에 실패한 낙오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내 비교의 대상은 허기에 지쳐 홀쭉해진 배를 움켜쥐고 대구시내를 배회하던 그 소년이다.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 나의 자력으로 일할 수 있는 하루가 밝았다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다만 시인 존 클레어의 말처럼 만약 생애에 제2판(版)이 있다면, 단 한 군데 16세의 무단가출 부분만은 교정을 하고 싶다.

 

조선일보, 2008/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