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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겨울 희망편지] [5] 역경이 오면 역전을 노려라

하마사 2008. 12. 31. 11:55

 

[2008 겨울 희망편지] [5] 역경이 오면 역전을 노려라

 

가난·신장癌과의 '경기' "지면 끝장" 의지로 이겨
감독 7번 불명예 퇴진도
김성근·프로야구 SK 감독

 

 

나는 일본에서 18년을, 한국에서 48년을 살았다. 섭섭하게도 '반(半) 쪽발이', '일본식', '재일교포'라는 꼬리표가 지금까지 붙어 다닌다.


일본에 살 때는 가난했다. 우유와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비를 보탰다. 고3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처음 새 옷이란 걸 입어봤다. 그 가난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홀로 조국 땅을 찾았지만, 선수생활 3년 만에 어깨와 팔꿈치 부상으로 투수 생명이 끝나버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모국 생활 48년은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

세월이 흘러 올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 지난해에 이어 2연패다. 구단에서도 3년간 감독 계약을 연장해 줬다. 어느 틈에 나는 "이만하면 김성근이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인정받았구나" 하는 자기 만족에 빠져 살게 되었다.

며칠 전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은 이재원 선수 병문안을 위해 일본 도쿄에 갔다. 전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창밖에 어린 야구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까맣게 잊어버렸던 단어가 스쳐갔다. 바로 '초심(初心)'이다. 나는 나의 원점이 어디였는지, 어떻게 야구를 하면서 굶주림을 견뎌왔는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창에 자만심 가득한 내 얼굴이 비쳤다. 그래,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 직업은 감독이다. 감독의 임무는 이기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의무와 책임이요, 사명감이다. 감독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에 남아 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감독이라는 신분 때문에 모든 싸움을 받아들이고 도전을 거듭해온 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10년 전 쌍방울 감독 시절, 나는 신장암 선고를 받았다. '선고'를 받던 날 나는 군산 구장에 가서 경기를 치렀다. 한 달 동안 아무 내색 없이 벤치를 지키다가 휴가를 내고 콩팥 제거 수술을 받았다. 마취 직전 간호사가 말했다. "어서 나아서 경기장에 돌아가셔야죠."

수술이 끝나고 나는 의사들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실에서 일어나 걸어다녔다. 수술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기에서 패배하면 야구 못하고 죽는다"는 생각으로 후유증을 이겨내고 구단으로 복귀했다. 지난 9월 프로야구 통산 1000승을 달성하던 날 이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10년 동안 사람들은 내가 결석 제거 수술을 받은 줄 알고 있었다.

39년 감독 생활 동안 나는 패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야구인생 동안 10번이나 맡은 감독이지만, 그 중 7번은 불명예 퇴진이었다. 2002년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도 구단과 불화를 빚어 옷을 벗었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패전과 실패는 감독의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 친구들이 토대가 되어 더 발전하는 법이다.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 대책을 강구하고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갖고 도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내가 잊고 있던 초심이었다.

역경과 고난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은 역전을 위한 좋은 찬스다. 세상이 힘든 때다. 나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 어떤 고난이 와도 다시 기회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한다. 

 

 

조선일보, 2008/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