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한국교회역사탐방

한서 남궁억 기념관, 한서교회

하마사 2008. 7. 16. 16:38

한서 남궁억선생

한서남궁억 선생은 1867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셨으며 독립운동가,교육자,언론인,종교인으로 본관은 함열이시고 자는 치만, 호는 한서이다.

 



1884년 영어 학교인 동문학을 수료하시고 칠곡군수,내무부 토목국장,성주목사,양양군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황성신문 사장과 대한협회 회장직을 역임하시면서 독립신문, 황성신문, 교육월보 등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에 압장 섰다.

1918년 선조의 고향인 홍천군 서면 모곡(보리울)에 낙향하여 '교회' 와 '모곡학교' 를 설립하였으며 무궁화 묘포장을 가꿔 나라꽃인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였고,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등 1백여 곡의 애국가요를 직접 지어 보급였다.

1993년 11월 독립운동 비밀결사대인 '십자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토옥되어 옥고를 치루고 그 후유증으로 1939년 77세의 나이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타계 하였다.

1977년 건국훔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저서로는 '동사략' 과 '조선이야기'등이 있다.

한서남궁억 기념관

한서남궁억기념관은 독립운동가 남궁억선생의 고귀한 민족사랑의 정신을 기리고,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위치: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2리 387

관람시간:
-3월∼10월 : 10:00∼19:00
-11월∼2월 :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 명절당일

전시품:
-저서:동사략,조선이야기
-무궁화 십자당 사건 취조장면(디오라마)
-보리울 모곡학교 복원모형
-남궁억 선생 붓글씨(열폭병풍)
-날궁억 선생 궁서체 글씨
-무궁화 십자당 사건 재판기록(20권)
-독립신문 발행(독립신문 연인본)
-황성신문 창간(황성신문 영인본)
-건국훈장 국민장
-상장
-무궁화 자수지도
-가정교육책자
-교육월보 책자
-청취코너(주일학교가,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모곡예배당

남궁억기념관 옆에 자리하고 있는 '모곡예배당'은 1919년 9월 한서 남궁억 생이 현재자리에 예배당을 건립하고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무궁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1월 '무궁화사건'으로 선생께서 구속되시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뜯겨 폐교된 것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홍천 한서 남궁억 묘역

-강원도기념물 제77호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자 언론인인 남궁억 선생(1862-1939)의 묘역이다.

선생의 묘에는 둥글게 호석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세사음식을 올려놓을 수 있는 상석이 있다.

상석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그 앞쪽으로 망주석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역의 입구에는 돌계단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1977년 홍천군에서 조성한 것들이다.

 




 
 
 
 
 
 
없음

-44번국도 : 양평 → 홍천군 남면 → 기념관
-5번국도 : 춘천 → 홍천 → 기념관
-86번지방도 : 가평 → 기념관 → 홍천
-중앙고속도로 : 대구 → 원주 → 홍천 → 기념관

 

 

한서교회

 

한서교회

 

한서교회 진입로에 들어서면 오른편엔 한서교회,왼편엔 한서 남궁억 기념관, 중앙엔 복원 예배당이 세워져 있다. 교회 앞엔 80여 종의 무궁화가 2000그루 가량 심어진 ‘무궁화 동산’이 조성돼 있다. 한서 선생이 일제에 맞서 무궁화 묘목 30만그루를 심어 전국에 퍼뜨리기 위해 만든 무궁화 묘목장이다. 

 

무궁화동산

 

한서교회    

 

한서교회 건물 앞에는 신축 당시 없었던 종탑이 높게 서있다. 남궁 선생의 정신을 받들었던 어느 교인의 신앙유산을 기린 유자녀들이 지난 2000년 기증한 것이다. 

 

한서교회

 

남궁억 장로 기념비

 

남궁억 장로 기념비

한서교회

 

한서교회 입구  

 

 한서교회 제단

 

한서교회 내부

 

 한서교회 내부

 

한서교회 내부

 

복원 된 모곡예배당      

 

기념관 옆으로 말끔히 복원된 옛 모곡교회당 건물이 있다. 한서교회의 옛 이름인 모곡교회당에는 마찬가지로 남궁 선생의 정신이 표현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운데 흰 천을 중심으로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리던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모곡예배당

 

모곡예배당

 

모곡예배당

 

모곡예배당 내부

 

모곡예배당 내부

 

모곡예배당 내부

 

모곡예배당 내부

 

모곡예배당 내부

 

모곡예배당 내부, 남 녀 구별 좌석 모형      

 

남궁억 기념관

 

남궁억 기념관, 왼쪽이 기념관 오른쪽이 한서교회이다.

  

남궁억 기념관, 오른쪽이 한서교회이다.

 

남궁억 기념관

 

2004년 6월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이 개관됐다. 이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위대한 인물의 기념사업을 통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로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남궁억 기념관(좌), 모곡예배당(우)

 

남궁억 기념관 개관 사진     (사진제공- 한서교회 현재호 목사)

 

2004년6월29일 충의문화유적 관광벨트 조성사업으로 남궁억 장로 기념관이 개관 되었다. 사진 맨 오른쪽이 현재 한서교회

담임목사인 현재호 목사이다. 이 사진과 남궁억 장로 기념관 내부 남궁억 관련 자료 사진은 현재호 목사가 도움을 주었다.

 

남궁억 기념관 개관 사진    

 

남궁억 장로 상  

 

 

 

 

모곡예배당과 남궁억 필적 비

 

남궁억 필적 비

 

남궁억 필적 비

 

남궁억 기념관         

 

한서 남궁억 기념관에는 무궁화 십자가당 사건 취조 장면 재현, 보리울 모곡학교 모형, 남궁억 선생의 붓글씨와 저서, 독립신문 영인본, 황성신문 영인본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그가 작사한 노래 중 10여곡을 청취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입구 남궁억 상과 유언글

 

남궁억 상

 

남궁억 상

 

남궁억 흉상        

 

한서 남궁억(1863~1939년)선생은 고종황제 영어통역관, 황성신문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일제시대에 많은 정치, 교육활동을 했다. 남궁억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사람으로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강사로 나가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 애국정신을 가르쳤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남궁억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남궁억은 무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실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서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여권의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했고 고향에 내려온 남궁억은 먼저 모곡리 고향 마을에 교회를 짓고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남궁억 교장은 학교 뒤뜰에 무궁화 밭을 일구어 7만이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몰래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무궁화 노래를 지어 널리 퍼뜨려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나라꽃 무궁화처럼 독립운동을 하는데 무난한 상징물은 달리 없었다. 남궁억은 무궁화만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남궁 선생은 찬송가 371장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노래와 역사책 <동사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책을 저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남궁 선생의 지치지 않는 민족혼은 1922년 9월 마태복음 9장 35∼38절을 묵상하고 드린 기도문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 가진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하 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그러나 1933년 남궁 선생이 지은 <무궁화 동산>이란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 불려지게 되자, 일제는 보안법 혐의로 체포한다. 1936년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으로 석방된 74세의 남궁 선생은 결국 1939년 소천하였다. 

 

남궁억 유언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수나무 밑에 심어 거름이 되게 하라”라고 남궁 선생은 유언했지만 후손들은 그가 늘 새벽기도 하던 유리봉에 무덤을 만들었다.  

 

한서 남궁억 장로

 

무궁화 지도

 

기념관

 

내부 전시실

 

독립신문 발행

 

독립신문, 남궁억이 편집 적극 활동하였다.

 

독립신문 영인본

 

독립신문

 

영자 독립신문

 

황성신문

 

황성신문

 

황성신문 영인본, 남궁억 장로가 창간 사장, 주필로 있었다.

 

황성신문 

 

 

 

 

무궁화운동과 십자가당 사건

 

무궁화운동과 십자가당 사건 

 

무궁화운동과 십자가당 사건 재판 기록 20권

 

무궁화운동과 십자가당 사건 취조장면 (디오라마)

 

남궁억 붓글씨 열폭병풍 

 

 

한글서예 친필족자, 1933년 제자 조용구에게 써주심 

 

한글서예 친필족자

 

한글서예 친필족자

 

한글서예 친필족자

 

한글서예 친필족자   

 

무궁화운동 성지 전경

 

무궁화운동 성지 전경 

 

무궁화운동 성지 모형도, 예배당, 기숙사, 정구장, 종각, 묘?장 (좌), 학교 교사동(우) 

 

무궁화운동 성지 모형도

 

남궁억 활동, 집필 책자

 

관동학회, 현산학교 설립

 

전시실

 

모곡학교 졸업 및 수업증서

 

수업증서

 

수업증서

 

수업증서

 

상장

 

모곡학교 상장 

 

상장

 

가정교육(복사본)

 

가정교육 

 

남궁억 저 가정교육  

 

교육월보 창간

 

조선이야기 5권

 

조선이야기 5권

 

조선이야기 5권, 동사략

 

동사략

 

남궁억 저 역사책 동사략 

 

 

모곡리와 남궁억

 

모곡학교 만세운동

 

무궁화대전 6권

 

무궁화대전 6권

 

 남궁억 무궁화 예찬시

 

신편언문체법

 

신편언문체법

 

남궁억 저서 신편언문체법

 

언문톄법 내용

 

신편언문체법

 

무궁화 자수

 

무궁화 자수

 

무궁화 삼천리 자수 지도

 

무궁화 삼천리 자수 지도 

 

훈 포장 

 

문화관광부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무궁화보급운동을  전개한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 : 1863∼1939)선생을 2000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건국훈장 국민장 

 

남궁억 어록

 

남궁억 의견서

 

남궁억이 지은 노래들

 

남궁억이 지은 노래

 

남궁억이 지은 노래

 

남궁억이 지은 노래

 

남궁억이 지은 노래

 

 남궁억이 지은 노래

 

 

남궁억이 지은 노래

 

 

한서 초등학교, 남궁억 기념관 인근에 있다.

 

한서 초등학교, 남궁억 상

 

 한서 초등학교, 남궁억 상

 

학교 뒤 남궁억 묘역

 

남궁억 묘역 기념비

 

남궁억 묘역

 

남궁억 묘역 

 

유리봉 남궁억 선생 묘소    

  

한서교회 뒤쪽에 있는 한서초교의 정문을 끼고 왼편으로 돌면 한서 선생의 무덤이 있고 그 뒤로 300여개의 나무 돌계단을 올라가면 그가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던 유리봉 정상이다. 기도하는 한서 선생의 기념동상이 세워져있다.  묘비에는 정3품칠곡부사라고 묘비에 씌여있다. 민족위인들의 성역화사업 때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유리봉 남궁억 선생 묘소    (출처- http://blog.empas.com/njcho56/ ) 

   

묘비에는 정3품칠곡부사라고 묘비에 씌여있다.

 

남궁억 장남 묘

 

남궁억 장남 묘

 

기도 동상

 

한서 선생의 무덤 뒤로 300여개의 나무 돌계단을 올라가면 그가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던 유리봉 정상에 기도하는 한서 선생의 기념동상이 있다. 

 

무궁화공원       (출처- http://tab.search.daum.net/dsa/search?w=img&q=남궁억)

 

 무궁화공원 남궁억 상

 

무궁화공원 남궁억 상

 

무궁화공원 남궁억 상 

 

무궁화동산의 무궁화       (사진제공- 한서교회 현재호 목사) 

 

무궁화의 "무궁"은 "목근" 이라는 한자음이 변한 순 우리말로 "영원히 피고 또 피어 지지 않는 꽃" "영원 무궁토록 빛나 겨례의 환한 등불이 되어질 꽃" 이란 의미를 갖고있다. 무궁화는 국내 품종만 100종이 넘는다. 우리 무궁화는 생명력이 강하고 1년에 한 그루에서 2-3 천 송이의 꽃을 피운다. 무궁화는 5천년 우리 민족 시작과 함께 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구국정신의 표상이었다. 남궁억 선생은 우리 꽃 무궁화로 우리 민족의 광복에 대한 의지를 승화시켰고 민족혼 고취에 큰 공헌을 하였다.

 

자단심계, 자주색 꽃잎에 붉은 중심부가 있는 꽃   

 

 

 

 

 

청단심계, 푸른색 꽃잎에 단심이 있는 꽃

 

배달계, 흰색의 무궁화로 배달민족에서 유래

 

 

백단심계, 힌색의 꽃잎에 붉은 중심부(단심)가 있는 꽃, 정절과 지조를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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