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11.30 00:19 / 수정 : 2007.11.30 02:41
- ‘레인(Rain)’ ‘원스 데어 워즈 어 러브(Once there was a love)’ 등 1970년대를 풍미한 팝송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호세 펠리치아노(Feliciano·62). 오는 12월 29~30일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앞둔 펠리치아노를 미국 플로리다 웨스트팜비치(West Palm Beach)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 그는 “한국 팬들은 반응이 확실하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아시아 팬들 중에는 공연이 좋아도 좋다는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한국 팬들은 노래가 마음에 들면 열정적으로 환호하고 박수 치고 말을 걸더라고요.”
-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뉴욕으로 이주한 펠리치아노는 세계적 스타덤에 올라간 첫 라틴계 가수이다. 그래미상을 6회 수상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3000만장 이상 앨범 판매고를 기록 중. 그는 “지금이야 리키 마틴이나 샤키라 같은 라틴계 가수들이 팝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지만, 내가 데뷔할 당시만 해도 미국 주류 사회에서 사랑받는 라틴계 가수는 없었다”면서 “라틴계 음악인들이 팝 음악계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개척자 역할을 내가 한 셈”이라고 뿌듯해했다.
“당신이 가수로서 성공한 건 타고난 음악적 재능 때문이냐”고 묻자 그는 “노력도 무시 못한다”고 했다. 남자 형제만 11명인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탓에 음악 교육은 상상도 못했고, 선천성 녹내장 때문에 세상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혼자 집안에서 뒹굴며 레코드를 들으면서 악기 연주법을 배웠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연습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여섯 살 때 콘세르티나(concertina·소형 아코디언)를 연주하게 됐고, 아홉 살 때는 뉴욕에 있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클럽에서 아코디언으로 데뷔에 성공했다. 열일곱 살 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 커피하우스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경력을 쌓았다.
1964년 RCA레코드 담당자 눈에 띄면서 데뷔했지만 세계적 스타가 된 건 1968년이었다. 도어스(Doors)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라이트 마이 파이어(Light My Fire)’가 미국 차트 3위까지 올랐다.
1968년 월드시리즈 경기장에서 미국 국가를 부를 가수로 선정됐다. 라틴계 가수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때 그는 ‘대형 사고’를 쳤다. 모두가 악보대로 불러온 미국 국가에 자신만의 개성을 불어넣어 불렀던 것. 펠리치아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했는데 보수층과 극우주의자들로부터 협박이 빗발쳤다”며 웃었다.
예순이 넘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찼다. 그는 ‘기타 플레이어(Guitar Player)’ 등 세계적 음악 전문지가 선정하는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빠지지 않는다. “옛날처럼 오래 연습하지는 않지만 요즘도 기타는 하루 두 시간씩은 꼭 연습합니다.” 펠리치아노는 “마약이나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대해 관심도 많아 그는 “한반도가 빨리 통일되길 바란다”면서 “뭐든 갈라지고 대립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은 겨울만 빼면 참 좋아요. 이번 공연 때 너무 춥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추운 건 정말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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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계 팝가수 호세 펠리치아노-'케 세라'.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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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계 팝가수 호세 펠리치아노-리키 마틴과 함께.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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