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 |||||||||||||||||||||||||||||||||||||
<참길로 간 사람들①>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신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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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nebo99@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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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삶 속에서 수없이 하나님을 부르짖어도, 신과의 ‘참 만남’이 상실된 부름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나의 하느님을 찾는 것. 그것은 단편적인 신앙을 벗어나 깊이 있는 신앙으로 가는 길에 없어서는 안 될 통과의례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고민의 과정을 거쳤던 많은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간조(1861∼1930)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다. ‘나의 하느님’, ‘나의 기독교’를 고민했던 사람. 나아가 ‘일본의 하느님’, ‘일본의 기독교’를 고민했던 그는 서구의 식민지적 기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인에게 참 복음이 되는 기독교를 찾고자 애썼다. 그는 서구 일변도로 주입되는 기독교가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진리를 찾고자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진리가 서구의 것만이 아니며, 이교도로 통칭되는 다양한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현현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적인 일본적 기독교를 고민했던 우찌무라 간조와 기독교의 만남은 반강제적인 서구 기독교에 의해서였다. 기독교와의 새로운 만남 “예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외국인 구역에 가서 구경을 하자는 친구의 제안으로 처음 기독교 예배에 참석했었던 어린 우찌무라는 5년 후 삿뽀로농업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삿뽀로농업대학은 미국 메사추세츠주립 농과대학의 학장인 클라크 박사에 의해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상태였다. 클라크 박사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당시 학교의 1기생이었던 15명의 학생 전원이 예수를 믿겠다고 서약을 했다. 우찌무라는 당시 2기생으로 학교에 입학한 상태였는데 1기 선배들은 2기 후배들을 강제적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기독교 예배의 새로움과 서구인들의 따뜻함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그였지만, 강압적으로 기독교를 요구하는 힘 앞에서 그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4번 이상 사방의 신들에게 절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수호신들에게 기도하던 그에게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요구하는 많은 엄한 규율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정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강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여론의 힘에 밀려 우찌무라는 일본의 예수를 믿겠다는 서약을 하고 말았다. 강제적인 과정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미 내밀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많은 신들을 위한 수십 가지의 예배형식을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단지 하느님 한 분을 위한 예배만이 필요했을 뿐이며 점차 그의 말씀이 마음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새로운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립, 자주, 성서 - 우리의 교회를 세우라! 그렇게 받아들인 신앙은 학교의 동료들과 함께 모임을 이루면서 점차 깊어졌다. 그들은 함께 모여 많은 신학, 신앙서적들을 읽으며 토론하거나 신실한 기도 모임을 갖곤 했다. 그 작은 교회는 그들에게 매우 특별했는데 전적으로 민주적이어서 모든 학생들의 교회 직분이 동일했다. 그들은 그것이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사도적인 관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목사요, 신부요, 선생이자 신도였다. 그것은 우찌무라의 신앙관 형성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인데, 훗날 일본적 기독교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우찌무라의 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만나고 함께 신앙을 나누던 초창기부터 이미 서구의 교회 형태가 아닌 평등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882년 우찌무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교회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 삿뽀로독립교회였다. 그들은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고, 서구의 원조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외국의 원조 없이 순수하게 일본인만의 힘으로 교회를 만들려 애썼다. 교회의 모토는 자립, 자주, 성서였다. 구조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한 일을 해야만 했다. 빈둥거려서는 안 됐고 특별히 할 줄 아는 게 없다면 난로에 넣을 나무라도 잘라야 했다. 그들이 이처럼 다른 교회들과는 ‘차별적인’ 교회공동체를 추구했던 것은 훗날 그의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체계와 원리들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독특성을 신성하게 여기고 유지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신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실현된다 우찌무라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 삿뽀로독립교회의 결성과 활동이었다면,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 총장 실리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삿뽀로독립교회를 떠난 그는 많은 서적을 통해 만났던 실리 교수를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와의 인격적인 만남,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를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여태껏 참된 기독교가 아닌 ‘식민적이고 우월적인’ 기독교를 만나왔음을 절감하게 된다. “‘길들여진 코뿔소(회심한 이교도)’는 살아 있는 예다. 칠판에 그려진 예가 아니라, 최고의 현장에서 가져 온 최고의 표본이다. … 회심한 코뿔소로서 나는 선교의 서커스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할 것을 권한다. 그들은 길들여진 코뿔소를 응석받이로 만들며 ‘길들여지지 않은 코뿔소(회심하지 않은 이교도)들이 길들여진 코뿔소를 모방하게 만든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당신들의 일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에게 기독교 선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회고처럼 당시 서구 기독교는 다분히 식민주의적 선교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하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전부라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주류가 그러했다고는 말할 수 있으리라. 또한 기독교 국가의 우월주의는 인종, 지역, 자본주의와 맞물려 때로 제3세계들에게 폭력적이었음을 우찌무라는 직시했던 것이었다. 그는 그런 형태는 ‘참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구의 방식과 표현으로 획일화된 하느님은 분명히 일본인들이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찌무라에게 있어 참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바로 가장 일본다운 모습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었으며, 하느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말했던 무교회주의는 교회제도의 해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 교회, 죽은 제도, 교리, 교권에 대항하는 비판정신에서 연유된 것이었\. 이런 사고의 저변에는 서구 기독교가 가진 교리, 형식, 직제에 관한 깊은 회의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유추된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사랑과 신앙에 의해 맺어진 모임이 곧 교회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교회는 진보하여 유(有)교회가 되어지는 것이다. … 교회는 생명의 체구로서 균형을 갖추며 계속 무너지고 계속 세워지는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한편으론 결정체로 굳어버린 교회를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론 살아 있는 교회를 건설하기도 한다.” 우찌무라 간조. 그는 전생애를 통해 일본적 기독교를 위해 고민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진리가 눈이 파란 서구인들에게만 해당한 것이 아니라, 피부가 검은 흑인들에게도, 또 키가 작고 노란 일본인들에게도, 나아가 모든 인류에게 타당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 민족의 특성에 맞게 실현되는 기독교가 ‘참 기독교’이며, 그것이 곧 신이 원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형식과 제도,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서, 나, 하느님이 끊임없이 대화할 때 기독교의 참 진리가 실현된다고 강조했다. 서구 일변도의 기독교가 중심이었던 1백여 년 전의 그 때 인류의 보편이 되시는 신의 폭넓음을 깨달은 우찌무라 간조의 통찰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느님은 2천 년 동안 노력해서 얻은 우리의 민족적 특성이 미국과 유럽의 사상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기독교의 아름다움은 기독교가 하느님이 각 민족에게 주신 모든 독특한 특성을 거룩하게 만들어 준다는 데 있다. 일본도 동일한 하느님의 민족이라니 이 얼마나 복되고 격려가 되는 말씀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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