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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모든 진실

하마사 2019. 6. 25. 14:44

6.25 전쟁의 모든 진실
(진동은)


6. 25는 한반도가 1945년 8월15일 일본에서 해방된 후 일본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고 이것이 고착화 되어 남북에 각자의 정부가 들어섰는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김일성을 수장으로 하는 북한 공산군이 남한의 공산화 무력통일을 위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말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후 벌어진 가장 규모가 컸던 전쟁이며 남한을 돕기 위해 유엔에서 전투병력으로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참전했으며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중공군이 개입을 하여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남한과 유엔군은 압록강 해산진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1953년 7월 27일 결국 현재의 휴전선으로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서 전쟁을 휴전합니다.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이라해서 6.25전쟁이라 부르며 이 전쟁의 결과로 1953년 7월 휴전협정때 정해진 군사분계선이 현재의 휴전선입니다.


원인
6.25전쟁은 남한과 북한이 사회이념을 가지고 싸운 전쟁입니다.
북한은 소련의 사회공산주의를 선택하였고 남한은 미국의 민주자본주의를 선택하였기에 일어난 전쟁으로 6.25는 우리의 전쟁이지만 사실상 미소냉전에 의한 세계의 새로운 구도에 끼어들어 어떻게 보면 미소의 대리전쟁을 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2차대전으로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국은 공산주의가 퍼지지 않게 하려고 우리나라의 남한을 원조했고, 소련은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북한을 지원한 결과로 북한 김일성의 남침야욕과 합쳐 일어난 전쟁입니다.


과정
1950.6.25 북한군의 남침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1950.8.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
1950.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
1950.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
1950.9.15 인천상륙작전
1950.9.28 수도 서울 탄환
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950.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7.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951.10.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951.10.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951.12.18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4.20-26 부상병 포로 교환
1953.6.8 포로 송환문제 타결
1953.6.18 이승만 대통령, 전격적 반공포로 석방
1953.7.27 휴전협정 조인


결과와 이후 경과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전쟁의 영향
6.25전쟁이 우리민족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8.15해방이후 외세인 미소에 의한 조국의 분단이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2세대가 넘는 70년이 지난 현재까지 고착화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혈육의 정이 남아있는 이산가족 세대들도 자연의 이치에 의해 이제 사망하여 줄어들고 있기에 민족의 끈끈함이 더 사라지기 전에 민족의 분단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세대의 숙제일 것입니다


남한에 미친 영향
남한의 입장에서는 불법침략세력의 전쟁도발을 방어하기는 했으나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 이양까지 하는 주권국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패전이 아니지만 전쟁배상을 받지 못함으로서 승전이라 볼 수도 없는 피해만 당한 전쟁이었고 이는 임진왜란과 비교할 만한 배상 없는 상처만 남긴 전쟁이 되었습니다.


북한에 미친 영향
북한은 무력적화통일을 위해 남침을 했지만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착오로 미국과 유엔군의 신속한 개입에 대비하지 못해 결국 압록강 해산진의 북쪽 국경까지 밀려 역시 중공군이라는 외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정권의 존망이 걸리는 지경까지 수세에 몰렸습니다.
결국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서 최초 삼팔선 수준의 휴전선으로 휴전협정을 이루어 내었지만 피해는 남한보다 더 심했고 국제적인 명분마저 잃음으로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는 전쟁을 치룬 패전이었습니다.


중공에 미친 영향
중공은 북한이 한국에 의해 병합되어 친미화 되면 당시 친미적인 장개석의 대만과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던 중국국내정세로 볼 때 대만 미국 한국의 어떤 형태로든지의 연합으로 인해 다시 내전에 휩싸일 우려가 있었기에 항미원조, 즉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도운다는 명분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자국에서 싸울 우려가 있던 전쟁을 한반도에서 대신 싸움으로서 임진왜란 시 조선 땅에서 일본과 싸운다는 명의 입장과 비슷한 입장의 전쟁행보를 합니다.
전쟁결과를 물질적으로 직접 얻은 것은 없었지만 대만세력의 전쟁의도를 견제 할 수 있었고 많은 국민당출신 중공군들이 인해전술에 의해 사망함으로서 군의 정치적인 정비효과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후의 북중국경협약시 유리한 입장에서 국경협정을 이끌어 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수많은 참전국 중 가장 효과적인 전쟁을 치룬 결과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미국에 미친 영향
미국은 에치슨라인을 잘못 그은 바람에 전쟁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고 결국 냉전시대를 맞아 동북아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사력을 다해 참전하지만 동북아의 공산화를 막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전쟁이었으나 세계의 경찰이 되는 교두보를 확보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유엔에 미친 영향
유엔은 첫 참전한 전쟁에서 나름대로 그 영향력을 제 국가들에 보여서 국제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상은 한국전쟁에 대한 각 국가들의 입장에서의 의미를 기술하였습니다.


그 외에 남북한에 공히 미친 영향
전쟁의 가장 큰 영향은 분단의 고착화이지만 남북한의 입장에서 별도로 전쟁의 영향을 한 가지 더 찾는다면 각자의 체제정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삼팔선 경계이후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 남북에 흩어져 있던 각각 반체제인사들이 자진 월남 월북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맞는 국가로 찾아갔고 또 남북 각 정부가 전쟁정국을 이용해 과감하게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과 학살을 통해서 제거 할 수 있었기에 반체제인사들의 자연 정화기능이 있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전쟁시작 후 서울이 함락되기까지 걸린 시간
1950년 6.25일 일요일새벽 04:00 3.8선 전역에서 인민군의 공격사격으로 남침을 시작하였습니다. 6.27일 미아리고개에 인민군탱크가 출현해서 6.28일 새벽01:00 서울 최후의 방어선인 미아리 방어선이 인민군의 전차에 돌파되면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6.28일 새벽 02:30분 부통령 이시영이 한강철교를 통과한 직후 한강철교를 폭파합니다.
당일 11:30분 인민군이 서울의 중심부에 진입하여 각 형무소 경찰서에 수감된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고 서울을 완전 장악합니다. 남침이후 서울점령까지 걸린 시간이 3일 7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고,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승리 없는 전쟁은 막을 내린 것입니다.


상황과 내용


북한군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웅진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은 곧 38선을 연하여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북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한군을 격파하며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유엔군 참전
미국은 6월 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게 되자 연합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15일 서울에 진입하게 된다. 서울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는 38도선을 지나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중공군의 개입
유엔군의 공세가 가속화되자 중공군이 개입하게 되어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고 장기화활 조짐이 나타났다.


1.4후퇴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이때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전제의와 휴전회담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유엔연설을 통해 1951년 6월 23일 휴전을 제의하였다. 종전을 원하던 중공과 북한은 휴전을 지지의사를 표명하였고, 미국도 긍정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7월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후 정전협상이 체결될 때까지 38선 부근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판문점 접촉
유엔군사령관은 양측전선 중간지점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면서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실질적인 의도는 적을 유엔군 관할지상에 끌어들임으로써 발언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이것은 개성을 잃게 된 원인이 되었다.


휴전협정 서명 (1953.7.27)
전쟁 당사자인 한국을 제외하고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은 전문과 5조 60항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3년 1개월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던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다.


1950년
6.25 북한군 남침
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선공중지 결의
6.27 미국, 극동 해.공군의 한국지원 명령
7.20 대전 수복실함
8.1 미 제8군 사령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명령
9.15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 수복
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0.19 국군-유엔군, 평양 탈환
10.25 중공군, 제1차공세 개시
12.14~12.24 국군.유엔군, 흥남철수작전


1951년
6.4 1.4후퇴, 서울 피탈
6.14 국군.유엔군, 평택-삼척의 신방어선으로 철수
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7.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0.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0.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2.18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년
8.20~8.26 부상병 포로교환
6.8 포로송환문제 타결
6.18 이승만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7.27 휴전협정 조인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아군은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 계속 북진하여 1950년 10월 20일 평양을 점령,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1950년 11월 17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유엔군은 오산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1951년 1월 15일 유엔군은 대반격 작전을 개시, 1951년 3월 4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1951년 3월 24일에 38도선까지 진격하였습니다.
1951년 3월 12일 미 제8군 사령관 Ridgeway 장군은 "38도선에서 휴전이 된다면 유엔군의 대승리" 라고 말한 바 있으며, 미국정부도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문제를 유보하면서 휴전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1년 6월16일 Trigbri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전의 휴전을 정식제의 하였으며, 6월 27일에는 Gromyko 소련 외무상이 휴전관련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미국 정부는 소련의 제의에 대해 검토 후 휴전회담 가능성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1951년 6월 29일 유엔군 사령관 Ridgeway 장군으로 하여금 휴전을 제의토록 지시를 하달하였습니다.
미정부로 부터 지시를 받은 Ridgeway 사령관은 1951년 6월 30일 방송을 통하여, 공산 측에 휴전을 위한 연락관 접촉을 원산항에 있는 덴마크 병원선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자, 공산측은 1951년 7월 1일 방송을 통하여 개성에서 접촉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체결협정 -정전회담 대표 김남일 대장
쌍방은 2-3회에 걸친 상호방송을 통한 제의를 통하여 1951년 7월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래봉장'에서 대령급을 대표로 하는 예비회담을 개최키로 합의, 최초의 접촉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1951년 7월10일 첫 휴전회담이 개최, 26회까지 개성(래봉장)에서 회담을 갖고 1951년 7월 20일부터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이동, 휴전을 위한 회담이 계속되었습니다. 기간 중에 쌍방은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188회의 참모장교 회담, 238회 연락장교 회담등 총 765회의 회담을 갖고 드디어 1953년 7월 25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일시, 과정
1950.10
아시아 및 아랍 13개국이 UN정치위원회에 한국전의 정전을 위한 3인위 설치안 제출3일 정전위원회 발족및 신정전5개항 채택


* 신 정전 5개항
1. 즉시정전
2. 영구평화를 위한 휴전중의 행동
3. 적당한 단계에 외국 군대의 철수
4. 휴전 중 UN의 한국행정 감시
5. 극동문제 해결을 위한 미영소중공의 회합
* 상기내용에 대해 소련과 중공의 반대로 인하여 최초의 정전협상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음.

1951.5
-서울 재탈환('51년 3. 16)후 미국무성 및 국방성은 한국전 휴전문제를 공식거론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 유엔군 회원국들과 협의 후 한국전 휴전제의 관련 성명서를 발표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 특별담화 발표

1951.6
-주 유엔소련대사도 한국전의 휴전을 제의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회 등 우리 민족은 38선상에서의 휴전에는 반대

1951.7 –유엔 측과 공산 측의 수정안으로 예비회담이 개최

-1951년 7월 10일 제1차 정전회담 개성서 개최
*유엔군 측은 한국전의 정전 및 차후 이의보장에 대해 토의할 것을 언급하는 한편 공산군 측은 38선의 군사분계선화 및 외국군의 철수를 주장, 정치적 문 제등으로 일관함.

1951.10
-유엔 측이 회담장소 이전의사를 밝히자 소련 측이 판문점 지역을 제안
-연락장교단 접촉을 판문점 근방에서 가진 후 새로운 회담장소로 판문점을 정하게 됨.
*판문점의 원래 지명은 “널문리“인데 이를 중국어 표기에 용이토록 하기 위하여 판문점으로 개칭함.

1951.11
합동분과위원회에서 쌍방 수석대표는 현전선을 잠정적으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전투를 중지할 것이 합의되었으며 이 결과 서부지역에서 개성과 장단평야 일부가 공산 측에 넘어가게 됨

1951.12 포로 석방과 관련된 문제 제기
*유엔측 : 쌍방의 전포로 석방
*공산측 : 쌍방 포로 전체를 일괄 교환
-> 포로의 자유 송환시 공산측 포로들이 송환을 거부할 것이 예상되며 그 결과로 차후에 전선의 북괴군이 자진해서 유엔군에 투항할 것을 염려하여 포로의 일괄 송환을 주장함.

1952.12
유엔에서 포로처리 문제에 대한 인도안이 가결됨(찬성54, 반대5)
*인도안 주요 내용
-중감위 체코, 폴란드, 스웨덴, 스위스 대표로 포로송환위원회 구성
-포로 송환을 반대하거나 강제 송환 금지
-포로 전원은 비무장지대로 이전, 송환위원회 인도
-송환을 불 원하는 포로들은 휴전성립 90일 후에 정치회담에 이관

1953.5 쌍방 포로인원 송환 실시
-아측 인수인원 : 784명
-북측 인수인원 : 663명

1953.7
유엔측 사령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공지원군 사령관 간의 한국전 휴전협정에 서명


6.25전쟁의 결과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 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