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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을 위한 평화의 기도] 평화통일을 향한 회개의 기도문

하마사 2019. 3. 7. 15:51


사랑의 하나님, 일주일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선 비분강개한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통일된 한반도를 바라보는 마음은 한결같으나 어떤 통일을 맞이할지에 대한 입장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분단된 지 벌써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 많은 만남과 더 깊은 신뢰의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지 낙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기대와 소망을 가져봅니다.

힘과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 우리는 북녘의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보며 비판했습니다. 아니 비난했습니다. 주체사상과 수령론이 서로의 신뢰를 파괴한다고 격렬하게 질타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향한 우리 정치인들의 야망도 만만치 않습니다. 자기 이익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권력의 속성입니다. 권력을 획득한 자는 속으로 외칩니다. “공동체도 나를 위해, 국민도 나를 위해, 국가마저 나를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처럼 파렴치한 권력자를 수없이 봐왔습니다. 그때마다 국민공동체는 무기력해지고 획일화된 독재 국가로 변질됐습니다.

때론 교회 안에도 그런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교회도 나를 위해, 성도도 나를 위해, 하나님마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럴 때 교회공동체는 타락했습니다. 세속보다 더 무지하고 욕심 많은 집단으로 변모됐습니다. 하나 됨의 축복을 외면했고 더욱 분열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지금 믿음의 사람들이 누구보다 먼저 통일과 평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내부 갈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남남갈등의 중심에 영적 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시 회개하며 기도하게 하소서. 하늘의 권력을 가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며 비웃고 계신다(시 2:4)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지역교회보다 더 큰 분, 교파보다 더 큰 분, 종교 정치 경제 이념보다 더 큰 분, 바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며 나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아멘.

김지철 목사(숭실대 기독교통일지도자훈련센터 실행이사회 의장, 전 소망교회 담임목사)

▦ 통일기도문 해설

첫 번째 감상: 슬프고 아프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는 모습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신뢰(Trust)’란 단어였다. 신뢰 부족은 모든 인간관계, 사회관계, 정치 관계를 단절시킨다. 우리가 지금 신뢰 결핍증을 앓고 있구나하는 탄식이 나왔다. 우리 공동체는 거대 담론인 통일과 평화를 말하면서도 곳곳에서 발생하는 진영논리에 너무 쉽게 묻히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주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읽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나는 인류를 위해 예수님처럼 죽을 수는 있다. 그러나 허름한 거지와 하룻밤을 지낼 수는 없다.’ 우리는 평화통일이라는 거대담론에는 열을 올려 주장하고 논쟁한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친구와는 반목하는 것이 우리 삶의 현상이 아닌지 되짚어본다.

통일에 대한 당위성도 그렇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조부모 세대는 6·25 전쟁의 참혹상을 경험한 분들이다. 통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지만 과거 공산주의의 만행이 잘 용납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미움과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부모 세대에도 이러한 분노의 이야기가 전승되어왔다. 머릿속에 이미지화된 저항의식 때문에 닫힌 마음이 쉽게 열리질 않는다. 북한을 향한 신뢰 프로세스에 들어가지도, 갈 수도 없다고 여긴다. 저 못된 권력자들이 무너져야, 그들이 사라져야만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제 자식과 조손의 세대가 됐다. 새 세대에게는 희망이 보인다. 통일 염원은 기존 세대보다 훨씬 떨어진다. 어쩌면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심이 더 크기도 하다. 통일이란 거대 담론이 자기의 삶에 잘 어울리질 않는다고 여기기도 한다. 통일이 돼도 좋고, 안 돼도 그만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미움과 적대감이 부모 세대보다 훨씬 옅어져 있다. 이것이 앞으로 통일을 이루는 하나의 정신적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감상: 권력욕의 뿌리가 바로 내 속에 있다.
권력욕이란 가장 깊이 뿌리박은 인간의 욕망이다. 자기 보존의 욕망이다. 더욱 확대하면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가장 격렬한 특성을 지닌다.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갈등과 다툼의 뒷면에는 바로 이런 권력욕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권력욕이란 물욕이나 성욕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을 이끌어가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만 만나도 시작되는 것이 권력욕의 충돌이다. 어릴 때부터 누가 더 크고 더 힘이 센가를 다툰다. 권력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어려서부터 체득한다. 그러면서 권력의 서열을 만들어낸다. 때론 사랑스러운 부부도 이 권력 때문에 다툰다. 누가 더 주도권을 쥘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싸움을 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 힘을 축적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국가 단위에서 보면 첫 번째가 군사력이고 그다음이 경제력이다. 이를 확보하는 일이 곧 권력자가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권력의 기초는 군사력의 확보이다. 북한이 핵무장을 통한 자기 보호와 자기주장을 하려는 이유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힘이 없는 권력이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국가권력이란 이미 삼권분립,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체제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삼권분립이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이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바로 국민에게서 나온다. 사람이 중요하다. 오늘날 권력자들이 여론조사에 민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권력자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국민 앞에서 드러나는 자기 이미지와 상징이다. ‘우리의 지도자는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문제를 깊이 인식하며 치유하는 지도자’란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길거리나 시장 등 그런 이미지가 드러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등장한다.
권력자에게는 두 가지의 이미지가 소중하다. 하나는 신비한 매력이다. 다른 하나는 친절과 배려이다. 과거의 독재자들은 신비의 매력에 방점을 두었다면 현대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후자인 친절과 부드러움에 집중한다. 그래서 소통과 대화가 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강조점을 둔다.

정치 권력의 핵심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곧잘 이간질을 시도한다. 공통의 적을 만들면 단결이 잘 되기 때문이다.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작업도 병행한다. 이들은 자주 질문한다. ‘너 어디 편이야? 좌파와 우파야? 적폐야, 촛불이야?’ 그럴듯한 질문이지만 아주 위험한 질문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대화 상대가 아니라 파멸할 존재로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정치 선동가들의 특성은 다른 게 아니다. 사람들이 지닌 부정적인 감정을 추출하는 데 도사다. 수 없는 적대자를 양산하고 미움과 분노를 일으킨다. 거기에 우리가 가진 것이 빼앗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위협을 가한다. 이는 엄청난 분란과 분열을 조성한다. 공동체성이 사라지게 만든다. 악한 지도자들이 상습적으로 하는 이러한 행동은 못된 짓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사회의 진통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정치적인 진영논리에 의해 수많은 사람을 좌와 우로 가른다. 경제적으로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서로 반목하게 한다. 세대 간의 갈등을 유발한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여혐과 남혐으로 몰아간다. 종교 간의 적대감도 증폭시킨다. 이런 진영논리가 자꾸 거세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차별하고 적대하는 논리 말이다.

교회는 다른가.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목사파가 있고, 장로파가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없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의 교파를 우선시할 수 있는가.

세 번째 감상: 회개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우리에게 제3의 목표가 필요하다. 더 큰 것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노력이 요청된다. 그래야 서로 만나고 용납할 수 있다. 제3의 지점이란 정치 권력자에겐 곧 국민이다. 교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바로 성도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늘과 땅을 만들고 시간과 역사를 주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하나 됨의 자리에 참여할 연습을 해야 한다.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국가 공동체를 위해 지도자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지도자를 위해 국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위해 목사를 세우고 장로를 세운 것이다. 목사와 장로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를 망각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우리가 회개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제목이다.

이러한 회개의 자리에 들 때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소중히 여기는 다양성 가운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남북 관계에서도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적용되는 원리가 될 수 있다.

김지철 목사(숭실대 기독교통일지도자훈련센터 실행이사회 의장, 전 소망교회 담임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123612&code=61221111&sid1=chr&sid2=0001


-국민일보, 20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