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이 殉國한 아웅산 묘지에서 追慕碑 선 것 보고 오랜 설움 덜어
愛國心은 나라 위해 희생한 이를 나라가 잊지 않을 때 우러나는 것
현재의 갈등·분열 극복 위해서도 건국·발전 공로자 기념관 세워야
-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
추모비는 아버님을 포함한 17분이 순국하신 장소에서 불과 50여m 떨어져 있었다. '미얀마의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을 기리는 미얀마 최고의 성지(聖地)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동시에 미얀마에서 가장 웅장하고 가장 오래된 불교 사찰인 쉐다곤 사원과도 맞닿아 있었다. 추모비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간결했다. 육중한 검은색 콘크리트 벽면에 가신 분들의 이름과 순국 당시의 직책이 흰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비석 같기도 하면서 현대적 감각의 메모리얼(memorial) 모습도 갖췄다.
미얀마의 영웅을 기리는 성지와 불교국가 미얀마의 최고 사찰이 만나는 장소에 타국의 외교사절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초입에 다른 나라가 자국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관을 짓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발상이다. 이런 불가능이 가능했던 것은 30년이 지나서도 결코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외교부와 세종재단, 조선일보의 집념과 노고 덕분이다.
유가족의 일원으로 추모비를 보면서 느낀 것은 나라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나라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 목숨 바치신 분들을 잊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지난 30년간 쌓였던 서러움과 섭섭함의 무게가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유독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분이 많다. 나라를 잃어 봤기에, 전쟁으로 나라가 사라질 뻔했기에 그런지 나라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나라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는 것을 우리 국민은 직감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막상 나라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나라 사랑은 늘 짝사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나라가 우리를 사랑해 준다고 느낄까? 복지 혜택을 많이 주고, 세금을 감면해주고, 군 복무 연한과 등록금을 줄이면 느낄까? 아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국가가 당연히 해 줘야 할 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나라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나라가 나를 기억해 줄 때다.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잊히는 것이 가장 화나고 서러운 일이다. 이 때문에 가족이든, 동창이든, 동향(同鄕)이든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억해 주는 것이 나라를 고마워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워싱턴·런던·파리·로마·모스크바는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기억하는 기념관·기념비·동상으로 가득 찼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몰자를 기리는 기념관에도, 9·11 사태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관에도 새겨져 있는 문구는 한결같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Never Forget).'
워싱턴의 수많은 기념관과 기념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월남전 기념관이다. 1981년 당시 예일대 2학년생이었던 마야 린이 제출한 설계가 1400여 개 응모작 중 선정되었다. 설계는 단순함의 극치다. 검은 대리석 벽에 월남전 전사자 5만8000여명의 이름을 새겼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찾으면서 사랑하는 아버지, 남편, 형, 동생, 할아버지, 숙부, 동창, 친구의 이름을 찾는다. 찾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형언키 어려운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라가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진한 감동을 느낀다. 그때야 비로소 가신 분들에게 '우리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편안히 눈 감으소서'라고 고(告)할 수 있다.
서울에는 기념비와 기념관이 너무 없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을지문덕 장군, 다산 정약용 선생 등 옛 인물들의 동상은 있지만 역대 대통령은 물론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기여한 분들을 기억하는 기념관과 기념비·동상·팻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 정치적 불신과 분열 때문에 대한민국을 만든 분들이 잊히고 있다. 그분들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분들을 잊고 있는 나라에 대한 섭섭함이 사무친다. 비록 나와 이념·원칙·소신은 달랐지만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서로에게 상기시키고 기리는 것만이 우리 시대의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나라는 기억 공동체다. 나라가 할 일은 기억해 주는 것이다. 기념관을 세우자. 그래야 나라가 선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조선일보, 2014/6/11
'자기계발 > 기타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량, 그 초인적 실존 (0) | 2014.08.07 |
---|---|
"유대인이 나치 戰犯 추적하듯 한국도 위안부 가해자 찾아내야" (0) | 2014.06.26 |
5분 글쓰기 훈련 (0) | 2014.05.14 |
남한산성 (0) | 2014.05.03 |
분노와 절망을 감사와 희망으로 바꿔주는 사람들 (0) | 2014.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