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 사회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산업사회화, 정보화, 세계화, 다원주의적 경향 등이 장차 인류 문명의 큰 흐름을 바꾸어놓는 문명사적 전환을 가져 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각 개인과 가족의 삶의 조건과 내용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는 현대사회의 부모에게 새로운 역할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준비와 노력을 요구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모의 역할은 변화한다. 과거 농경 위주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요구되던 부모의 역할과 산업사회, 혹은 현재와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 요구되는 부모의 역할이 서로 다르다. 또한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발달 단계에 따라 변화한다. 영유아를 자녀로 둔 부모는 성년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부모 곁을 떠나가는 자녀를 둔 부모와는 그 역할이 다르므로 그들의 관심과 요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모의 역할은 변화한다. 과거 농경 위주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요구되던 부모의 역할과 산업사회, 혹은 현재와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 요구되는 부모의 역할이 서로 다르다. 또한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발달 단계에 따라 변화한다. 영유아를 자녀로 둔 부모는 성년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부모 곁을 떠나가는 자녀를 둔 부모와는 그 역할이 다르므로 그들의 관심과 요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모는 기본적으로 자녀에게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물리적 환경을 제공하여야 하며, 그 뿐 아니라 자녀가 바람직한 인성을 가진 성숙한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에릭 프롬은 성경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이야기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모성이 자녀에게 주어야 할 젖은 어린애의 생명유지와 성장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기가 젖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젖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꿀은, 젖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그 무엇을 채워 줌으로써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성애는 젖이 줄 수 있는 존재의 단순한 보호 및 긍정을 넘어서서 삶에 대한 사랑, 살고 있다는 행복감, 즉 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성숙된 사랑을 통해 가능하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은 인간 생존에 있어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매슬로우(Maslow)에 의하면 이것은 자기 확신으로 이어지고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하나의 기술이며, 따라서 이론과 실천의 습득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기술을 숙달하고자 하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젖과 꿀을 주어야 할 어머니는 그러한 모성애를 실천하기 위하여 모종의 이론과 기술 습득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하나의 기술이며, 따라서 이론과 실천의 습득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기술을 숙달하고자 하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젖과 꿀을 주어야 할 어머니는 그러한 모성애를 실천하기 위하여 모종의 이론과 기술 습득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선 자녀에게 젖과 꿀을 주기 위해서는 자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즉 자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자녀를 나의 부속물이나 소유물로 보지 않고 한 독립된 인격체로서 인정하는 자세가 기본이 된다. 우리 아이가 잘하는 것, 못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 하기 싫어하는 것, 부모인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 자신이 원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부모 역할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부모의 역할 수행은 자녀의 현재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accept)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내 아이의 발달상의 특징과 내 아이가 가진 재능, 능력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부모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아이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모는 항상 내 아이가 가진, 혹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꿈과 기대는 현실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아이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그런데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존중해 주는 것(respect)이 필요하다. 있는 모습을 받아들이되,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부모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는 것이 요즘 많이 거론되는 다중지능이론이라 할 수 있다.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각 개인이 가진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발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나의 자녀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기대를 가지고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각 개인이 가진 개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며, 사회의 차원에서 보면 각 개인이 가진 개성을 다양성의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다음 단계는 부모가 자녀에 대해 기대를 가지는 것(expect)이다. 부모는 아이들이 펼쳐 갈 미래에 대하여 기대를 가져야 한다. 나의 자녀가 가진 재능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발하여 미래의 인생을 눈부시게, 빛나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녀의 미래에 대한 소망,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자녀에 대하여 accept, respect, expect하는 것이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 일반적이고 혹은 추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학부모들의 관심은 자녀의 미래 진로와 관련한 현재의 성취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학력의 신장이 아닌 학업 성적의 향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개인차를 지적인 성취수준의 차이로 해석한다. 그러나 다중지능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지능, 혹은 능력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부모의 역할 수행은 자녀의 현재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accept)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내 아이의 발달상의 특징과 내 아이가 가진 재능, 능력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부모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아이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모는 항상 내 아이가 가진, 혹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꿈과 기대는 현실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아이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그런데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존중해 주는 것(respect)이 필요하다. 있는 모습을 받아들이되,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부모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는 것이 요즘 많이 거론되는 다중지능이론이라 할 수 있다.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각 개인이 가진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발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나의 자녀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기대를 가지고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각 개인이 가진 개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며, 사회의 차원에서 보면 각 개인이 가진 개성을 다양성의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다음 단계는 부모가 자녀에 대해 기대를 가지는 것(expect)이다. 부모는 아이들이 펼쳐 갈 미래에 대하여 기대를 가져야 한다. 나의 자녀가 가진 재능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발하여 미래의 인생을 눈부시게, 빛나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녀의 미래에 대한 소망,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자녀에 대하여 accept, respect, expect하는 것이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 일반적이고 혹은 추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학부모들의 관심은 자녀의 미래 진로와 관련한 현재의 성취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학력의 신장이 아닌 학업 성적의 향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개인차를 지적인 성취수준의 차이로 해석한다. 그러나 다중지능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지능, 혹은 능력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온 것이다.
물론 지적인 측면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부모들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회는 지적으로 뛰어난 인재를 기대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철학자도 있었고, 또한 역사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다 인지적 측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좋은 아이로 지칭하며, 소위 학생의 ‘질’이라는 것을 학력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교육문화이고 교육관이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으로 우리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구성원을 필요로 한다. 가드너가 지적했듯이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능력을 발견하고 격려해주는 것이 21세기 부모의 역할이다.
글. 열린부모교육학회 최양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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