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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하마사 2006. 11. 30. 18:26
 

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

(주)웅진씽크빅 / 2005년 4월 / 269쪽 / 10,000원


▣ 저자  윤영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KBS의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기획 및 대본 작업에 참여했으며, KBS의 역사기획 <역사의 라이벌>, <역사 스페셜>, <환경 스페셜>, MBC의 <가야의 집>, <나비의 꿈 - 윤이상>, EBS의 <역사극장> 등을 집필하며 역사 및 시사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소설로는 장편 역사소설 『광야에서』가 있다.

▣ Short Summary

일본의 망언과 비상식적 행보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즉흥적 애국심이 아닌 절대적 카리스마로 난국을 헤쳐 나갈 진정한 리더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세계 해전사에 깨지지 않는 23전 23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당연한 일이다. 이순신은 7년에 걸친 전란 가운데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일본에서는 갈수록 더 많은 배와 더 많은 군사들이 건너왔고, 연전연패하던 일본군도 이순신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어떻게 모든 싸움을 이길 수 있었을까? 전선이나 병사의 수로 볼 때 절대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던 조선 수군을 어떻게 조련하고 지휘하여 매번 승리를 이끌어 냈을까? 이 책은 위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이순신이 승리로 이끌었던 20여 해전의 상황을 소설처럼 구성하였고, 각각의 전투마다 이길 수밖에 없었던 작전의 포인트와 이순신의 리더십을 짚어 오늘에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아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그의 지략을 어떻게 받아들여 장군처럼 무패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모색도 담겨있다.


▣ 차례

1   옥포해전

2   합포해전

3   적진포해전

4   사천해전

5   당포해전

6   당항포해전

7   율포해전

8   한산대첩

9   안골포해전

10  부산해전

11  웅천해전

12  견내량 봉쇄작전

13  칠천량해전

14  벽파진해전

15  명량대첩

16  예교해전

17  노량해전

 

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

(주)웅진씽크빅 / 2005년 4월 / 269쪽 / 10,000원



옥포해전


동쪽으로 쏜 화살은 동쪽으로 간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0여 일, 15만 일본군 선봉은 파죽지세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지만, 전란 소식을 듣고서도 이순신은 20여 일이나 지나도록 출전하지 않은 채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머물고 있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순신은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전투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전력을 탐사했을 것이다. 조정에서 적군과 싸우라는 공식 문서가 도착한 다음, 이순신은 마침내 출전을 결행했다.


1592년 5월 3일, 여수를 떠난 이순신은 당시 경상우수사이던 원균과 합류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원균은 4척을 보유- 했는데, 지금의 거제시 옥포만에 적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순신은 그동안 수집한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적의 무기 체계를 파악하여, 포격전으로 싸우기로 했다. 조선 총통의 경우 사거리가 500보 이상이나, 일본군 조총의 사거리는 100보 내외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옥포만 입구에 도달해 보니, 적선은 30척이었다. 처음으로 일본군을 마주한 조선 군수들은 긴장과 두려움에 떨었고,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마음 또한 착잡했다. ‘적은 백 년 넘게 전쟁만 해온 무리, 과연 우리 수군이 이길 수 있을까? 이겨내야 한다. 첫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앞날은 없다. 이겨본 자만이 이길 수 있는 법! 동쪽으로 쏜 화살은 동쪽으로 날아가지 않던가?’


이순신은 함대를 포격 사거리까지 진격시켰다. 그러고는 일자진을 펼치게 했다. 왜냐하면 조선 수군의 총통 대부분은 배의 측면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순신 함대를 본 일본군은 부랴부랴 전투태세를 갖추고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해 오며, 조총 사격을 가해 왔다. 그 총 소리에 조선 수군들이 몸을 움츠렸다. “두려워하지 마라, 적의 조총은 우리 배에 미치지 못한다. 천자총통을 준비하라!”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화포장과 포수들이 천자총통에 대장군전을 장전했다.


천자총통은 자체 무게만도 200킬로그램이 넘는 대형 총통이다. 쇠로 만든 커다란 통으로 아래쪽이 막혀 있는 원통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막혀 있는 맨 아래쪽에 적당량의 화약을 넣고, 그 화약에 닿을 수 있도록 종이로 꼰 심지를 만들어 총통에 나 있는 심지 구멍을 밀어 넣게 되어 있었다. 화약을 밀어 넣은 다음, 그 사이에 격목이라는 나무토막 -화약이 폭발할 때 폭발력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아줌- 을 끼운다. 격목 대신 흙을 다져 넣는 경우도 있다. 화약을 넣고 격목을 박은 다음, 총통 입구에 대장군전 -앞부분이 쇠로 되어 있고 날개가 달린 대형 화살로, 270센티미터가 넘는다- 을 넣는다. 이것을 천자총통에 넣어 쏠 경우 900보(약 1Km) 정도 날아간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장군전은 날아가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로 적의 성벽이나 배에 치명상을 입힌다.


“방포하라!” 화포장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대장군전이 천자총통에서 발사되어, 적선을 넘어 옥포 포구에 떨어졌다. “넘어갔습니다.” 포수가 즉각 보고했다. “화약을 줄여라! 포신을 낮춘 후 방포하라!” 조선군의 포격을 받은 일본군은 혼비백산했다. 대장군전이 떨어진 일본군 전선에는 그대로 구멍이 뚫렸고 그 틈으로 바닷물이 치솟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제서야 이순신은 접근을 명령했다. 군사들에게 적의 실체를 보여주고 그들이 조선군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드디어 적이 화살 사정거리까지 들어왔다. “사수 준비하라!” 뱃전에 늘어선 조선 수군들이 팽팽하게 시위를 당겼다. 사람을 향해, 적을 향해 날리기는 처음이었다. “발사!”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사수들이 시위를 놓았다. 날아간 화살은 수많은 일본군을 쓰러뜨렸다.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군사들 사이에 일었다. 이순신은 안도했다. 이제 적진은 완전히 무너졌다. 적선은 겨우 6척만이 해안을 끼고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조선 수군이 이긴 것이다.


이겨본 자만이 이긴다

마침내 출전을 결심한 이순신, 그는 임진왜란이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긴 싸움을 준비했다. 그래서 첫 전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첫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첫 전투의 승리를 위해 그가 준비한 전술은 원거리 포격전이었다. 원거리 포격전을 기획한 이순신은 적과 아군의 무기 체계를 연구한 다음, 적정한 전술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적중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된다는 사람이 있다. 사업을 한답시고 이것저것 열심히 시도는 해보는데 항상 폐업과 개업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인 취업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성공해본 경험이 없기에 원서만 내다가 결국은 만년 취업재수생이 되고 만다. 첫판을 이겨야 한다. 첫판을 이겨본 자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백배 충전하여 다음 싸움에도 최선을 다하게 된다. 나 자신의 경우는 어떤가? 만약 단 한 번도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다시 시작하라. 이길 수 있는 약한 상대를 만나 싸움을 걸어라. 지는 것은 습관이고, 이기는 것 역시 습관이다.


사천해전


긴 활이 짧은 활을 이긴다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중 전라도 도사로부터 급보 -군왕의 몽진- 를 받은 이순신은 일단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귀환하여 피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첫 출전에서 거둔 승전보였다. 이순신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개전 이후 처음 받는 승전보였던 것이다. 선조는 즉각 이순신에게 가선대부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이순신에게 경상도에 남아 있던 원균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일본군이 경남 사천까지 진출하여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천이라면 경상 바닥의 가장 서쪽. 만약 이곳에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한다면 여수 또한 위태롭다. 이순신은 즉각 출동을 명령했다.


1592년 6월 1일, 원균과 합류한 이순신은 곧장 사천만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함대가 진격하는 동안 적의 척후선 한 척을 만났고 곧바로 격파해 버렸다. 그러나 살아남은 적의 척후병들은 육지를 통해 달아났다. 이제 사천 선진 포구의 적들은 이순신 함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습전은 이미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전면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전선 20여 척을 포구 깊이 정박해둔 일본군은 병력을 언덕 위에 배치해 놓고 조선 함대가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 가운데 흰옷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조선 백성을 총알받이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들 때문에 유인 작전이 필요했다. 이순신 함대가 다가가 일제히 총통을 발사했으나,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썰물의 영향으로 함대가 선진 포구로 근접하기 어려운데다 원거리에서 발사를 하자니 포격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일단 함대를 후진시켜 기다리기로 했다. 한여름 해가 금오산 너머로 넘어갈 즈음 드디어 밀물이 되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 함대는 선진 포구를 향해 진격해 갔다. “방포하라!” 순식간에 선진 포구의 적선이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배를 잃는다면 부산까지 육로로 후퇴해야 하는데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판사판이라는 분위기로 일본군들이 포격당하고 있는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바람대로 배를 저어 포구를 벗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북선을 불러라!” 뒤처져 있던 거북선이 조선 함대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조선 함대를 향해 진격해 오던 일본군들은 놀랐다. 다음 순간, 거북선 양측 옆구리에서 일제히 포문이 열리더니 포신이 불쑥불쑥 나왔다. 그러고는 앞머리에서 총통이 한 발 발사되는 것을 신호로 거북선 양 옆구리에서 일제히 총통이 발사되었다. 거북선을 구경하던 일본전선 중 서너 척이 순식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제서야 일본군들은 거북선을 향해 조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조총탄은 거북선의 선체를 뚫지 못했다. 용감한 적장 하나가 자신의 배를 거북선에 붙이고, 군사들에게 거북선에 오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거북선 지붕으로 뛰어내린 일본군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젖은 가마니 안에 숨어 있던 뾰족한 철제 송곳에 찔려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후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거북선의 둥근 지붕에서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조선 수군들조차 의심했던 거북선의 위력이 여지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거북선의 맹활약과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일본 함대는 모조리 격침되었다.


비책을 준비하라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오래된 군사 서적에서, 조선 초 이미 조선 수군에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배를 만드는 데 특히 재주가 뛰어난 나대용을 영입하여 거북선을 복원하도록 했다. 그것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조선 초기 거북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척의 거북선이 건조되었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해전의 판도를 바꿀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닌 신무기였다.


신무기의 중요성은 이제 신상품으로 대체되고 있다. 신제품, 즉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나 비책이 없는 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 자신만의 비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비책을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비책에 대한 믿음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된다는 믿음이 첫걸음이다. 이순신이 철갑선을 만든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모든 우려를 극복하고 거북선을 만들어냈다.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북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약점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비책이 되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비책에 대한 믿음이 생긴 다음에는 철저히 상대를 분석해야 한다.


당항포해전


봄바람에도 꽃은 진다

1592년 6월 2일 당포에서 해전을 치루어 승리한 이틀 후, 이순신 함대는 거제에 적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발하려는 순간, 판옥선 25척을 보유한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합류했다. 이제 문제는 지휘부에서 생겼다. 이순신과 원균과 이억기, 이들은 모두 정3품 수군절도사, 즉 같은 계급의 수사(水使)였다. 한 부대에 사단장이 세 명이 되었으니, 연합 함대의 지휘권을 누가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을 것이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회의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순신이 지휘권을 가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다. 1592년 6월 5일 아침, 고성 땅 당항포에 적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은 연합 함대를 이끌고 당항포로 항진했다. 항진하는 도중 진해에서 함안 군수 유숭인에게 쫓겨 나오는 일본 전선 6척을 불태웠다. 당항포로 들어가는 입구는 바다의 폭이 300미터가 될까 말까 한 좁은 곳이다. 입구에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당항포까지는 약 30여 리이다. 이순신은 당항포 입구 당목 근처에 4척의 판옥선을 매복시켰다. 그런 다음 이순신은 장사진을 펼치게 하고, 삼면을 포위한 채 점차 포구를 압박해 들어가면서도, 적선에게 접근만 명령할 뿐 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방패를 높이고, 사수들은 화살을 쏘아라!” 드디어 일본군 조총 사거리까지 들어간 순간, 마침내 이순신이 내린 명령은 엉뚱하게도 화살을 쏘라는 것이었다. 당항포 앞바다는 일본군의 조총과 조선 수군의 화살 대결로 압축되었다. 접전이 이어지자 드디어 이순신이 바라던 반응이 일본군 진영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후퇴하라!” 이순신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를 쫓아왔다. 이순신의 유인 작전에 걸려든 것이다.


이순신은 당항포에 정박한 일본군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일본 전선을 모조리 격침시킬 수는 있으나, 만약 그러할 경우 육지로 올라갈 일본군들이 조선 민간인에게 보복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바다로 유인하여 적을 모조리 수장시킬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바다로 나온 일본 전선 26척은 뒤늦은 후회를 해야 했다. 물러나던 조선 함대가 일제히 총통을 쓰며 진격해 왔다. “총공격하라! 전 함대 총통을 발사하라!” 드디어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인 각종 총통이 발사를 시작했다.


당황한 일본군들이 조총으로 응사했지만 두텁고 높은 판옥선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이미 전열이 흐트러진 일본군 함대 사이를 거북선이 헤집고 들어가 적의 대장선 턱밑에까지 접근했다. 그러고는 포격과 당파(撞破)로 간단하게 제압해 버렸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격중지!” 느닷없이 이순신이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혼비백산한 일본군은 조선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남은 한 척의 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1554~1611. 충무공과 독음이 같다)을 불러라!” 방답첨사가 즉시 달려왔다. “적은 반드시 나머지 한 척의 배를 타고 당항포를 빠져나올 것이다.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잔적을 모조리 소탕하라!” 그제서야 장수들은 이순신의 의중을 읽었다. 과연 일본군은 이순신이 예상한 대로 움직였다. 그날 밤, 한 척의 배가 탑승 인원이 훨씬 넘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태우고 몰래 당항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곧 방답첨사 이순신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단 한 명의 적도 상륙시키지 않고 거둔 대승이었다.


자신의 행위가 끼칠 영향을 생각하라

전투를 떠나 이순신이 안고 있던 큰 부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이었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죄 없는 백성들을 유린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항포 해전에서는 적을 바다에 모조리 수장시키려 한 것이다. 현대전에서도 민간인 보호를 위한 수많은 협약과 교전 수칙 등이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목표만을 위해 뛰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생각해 보라.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하라. 나의 성과에 급급하여 그것이 타인에게 혹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승자라고 할 수 없다.



한산대첩


주먹은 자신이 쥐는 것이다

그 뒤 이순신은 율포 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점점 초조해 했다. 일본 육군은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차지했으나 남해 바다가 문제였다. 생각지도 않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 출현으로 연전연패, 보급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일본군으로서는 반드시 해로를 뚫어야 했다. 일본은 수군 전력을 총집결하여 이순신 함대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육군을 따라 북상했던 일본 수군의 용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해군에 전격 투입됐다. 그러던 차에 일본군이 견내량 북단에 나타났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공을 탐내어 자신의 함대만 -73척- 을 먼저 출동시켰다. 이순신은 어디서 싸울 것인가 고심했고, 한산도 앞바다를 선택했다. 지금까지는 이순신 함대가 일본 전선을 찾아다니며 전투를 벌였다면 이번엔 반대로, 모든 채비를 갖춘 일본 정예 수군 대부대가 공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특별한 전술이 필요했다. 이순신은 진중회의를 열었다.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칠 것이오!” 이순신의 선언에 장수들이 놀랐다. 학익진이란 대형을 학의 날개처럼 넓게 펼쳐 그 안에 적이 들어오도록 하여 포위하는 진법을 일컫는다. 유능한 장수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술로 학익진을 펼치려면 잘 훈련된 군사가 필요했다. 장수들의 의견은 분분했고, 특히 반대 의견이 많았다. 이순신 역시 이런 점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을 설득했다. 더구나 지금 조선 수군에게는 두 척의 거북선이 있었다. 거북선을 학의 양 날개 끝에 배치하여 적선을 학익진 안에 가두기만 하면 필승지세라고 설득했다.


결국 적을 유인하여 한산 앞바다에서 결전을 하기로 했다. 이순신은 즉각 5,6척의 판옥선을 띄워 견내량 북쪽 덕호리 포구에 주둔하고 있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부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선 판옥선을 본 와키자카 함대는 곧 응전해 왔다. 포구를 향해 쳐들어가던 조선 판옥선이 일본군의 응전에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일본군 전 함대가 아무런 의심 없이 조선 판옥선을 쫓아 나왔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산 위의 조선군 탐망꾼들에 의해 그대로 이순신에게 보고되었다.


드디어 한산도와 미륵도 양안에 매복해 있던 조선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주력 함대가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쫓겨 오던 판옥선들도 방향을 90도로 틀었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함대의 가운데 부분은 물살에 약간 밀리면서 조선 함대는 자연스럽게 폭이 깊은 반월형 진형을 갖추었다. 조선 판옥선을 쫓아오던 왜장 와키자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너댓 척의 조선 배를 추격해 왔는데, 어느 순간 조선 주력군이 눈앞을 막아선 것이다. “멈춰라! 함정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일본 배의 선두가 멈추자, 영문도 모르고 따라오던 후미의 전선이 앞선 배를 들이박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일본 함대는 진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드디어 외곽부터 조여오던 조선 함대에서 포격이 시작되었다. 조선 함대는 노련했다. 차근차근 정밀 포격을 하면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거북선은 빠져나가려는 일본 전선들을 차례로 당파했다.


“포위망을 뚫어라! 한 곳을 집중 공격하라!” 와키자카는 독려를 거듭했다. 몇몇 일본 전선이 조선 함대의 한 군데를 노리고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도 오산이었다. 한쪽 면의 포격이 끝나면 조선 배는 방향을 빙글 돌려 반대편에 장전하고 있던 총통으로 포격을 했다. 마침내 와키자카의 배도 강력한 조선 수군의 포격을 받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바다에 빠진 와키자카는 간신히 거제도로 헤엄쳐 갔다. 단 한나절 만에 73척의 대함대 중에서 59척을 잃었고 9,000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기적 같은 승리였다.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전선도 손상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적의 대함대를 격멸시켰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라

이순신의 한산대첩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학익진에 있다. 이순신 이전, 세계 해전은 그야말로 육박전이나 백병전이었다. 그것을 이순신은 총통을 이용한 포격전 개념으로 바꾸었다. 이제 그 포격전에서 이순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본격적인 진법 -학익진- 을 적용했던 것이다. 학익진을 펼치기에는 위험 부담이 적지 않다. 육지와 달리 바다는 날씨와 파도 등 미묘한 변수가 많아, 전 함대의 속도와 방향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순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학익진을 펼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이순신이 택한 것은 자신이 펼치려는 진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믿었던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하고 있거나 준비하는 일에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사의 판단을 바라거나 경험자에게 조언을 듣고자 한다. 남의 의견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은 그 어느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많은 의견을 듣되, 마지막 선택은 자신이 하라!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나를 믿게 만들 것인가. 최선의 선택을 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은 “계획을 세우고 상황을 맞추려 하지 말라. 상황에 가장 맞는 계획을 세우려고 노력하라.”고 했다.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면, 이제 자신을 믿어라! 스스로 믿지 못하면서 어찌 남을 믿겠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견내량 봉쇄작전


적의 눈동자를 보면서 지켜라

그 뒤에도 이순신은 안골포해전, 부산해전, 웅천해전 등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리고 1593년 4월 30일, 전쟁이 발발한 지 꼭 일 년 만에 조․명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일본은 끊임없이 강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시간을 벌게 된 일본군은 남하를 서둘렀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해안에 일본군이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고민하고 있었다. 갈수록 싸움은 어려워졌다. 아군의 강점을 잘 알게 된 적은, 싸움을 피하기만 하며, 포구 깊숙이 배를 정박시켜 놓고 산 위에 진지를 구축했다. 또 조총뿐만 아니라, 조선 총통까지 노획하여 조선 판옥선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1593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는 다시 여수에서 출항했다. 여수를 출발한 지 사흘째, 이순신은 한산 앞바다, 견내량이 바라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함대를 정박시키고 육로와 해로로 며칠째 첩보를 띄웠다. 그럴 즈음, 급보가 전해졌다. 수많은 적선이 견내량 북단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자 적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적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이순신에게 다시 전해진 급보, 그것은 진주성 함락 소식이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진주성을 교두보로 삼은 적은 이제 바닷길을 열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막아야 한다. 바로 이곳, 견내량을 지켜내야 한다.


이순신은 전 함대에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견내량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100여 척의 판옥선에 첨자진을 명령했다. 그러고는 견내량 북단을 틀어막았다. 몇 번씩 척후선을 띄우던 일본군은 끝내 정면 승부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견내량을 봉쇄하던 이순신은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는 또 다른 큰 결단을 내린다. 막아야 할 적과 가장 가까운 곳에 본영을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이보다 약간 먼저 마침내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서 정2품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명실상부한 조선국 해군 총사령관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견제해 오던 원균도,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이제는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지휘권의 통일, 그것은 이순신이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었다. 통제사로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 이순신은 이후 한산도에서 견내량 바다를 4년여 동안 굳건히 지켜냈다.


제1선에서 지켜라

전쟁이든 전투든 방어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아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할 경우 방어는 최후의 수단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순신이 지킨 자리인 것이다. 왜 하필 견내량이었을까? 견내량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적과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제1선’에서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삼도수군통제영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다. 굳이 전투가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지키려면 최전방, 제1선에서 지켜야 한다.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한번 뒷걸음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된다.


칠천량해전


풀은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지루한 강화 협상이 이어졌고, 전투는 소강상태였다. 그 긴장 속에서 이순신은 한산도를 굳건히 지켰다. 둔전이라 하여 직접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구워 군비를 충당해 나갔다. 한산도는 하나의 나라, ‘작은 조선’이었다. 이순신이 있는 곳이라면 안전하다는 생각으로 몰려든 피난민과 조선 수군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그 긴장 속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었다. 죄목은 무군지죄, 즉 임금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죄였다.


그보다 앞서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정유재란)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을 제거할 계략을 세웠다. 그들은 요시라라는 승려를 이용,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흘리고, 그때 이순신의 수군을 쳐서 그를 잡을 계획을 세웠다. 이 정보를 들은 조선 조정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신중했다. 적이 흘린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출전을 미루는 사이,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울산의 서생포로 상륙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이도록 했다. 막을 수 있었던 일본 부대를 막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명을 어긴 죄가 되었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불신은 이순신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불신은 이순신의 한산도 시절부터 싹튼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전란을 맞아 북으로 북으로 몽진을 갔던 반면, 이순신은 왜적을 막아내고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장수가 되었다. 만약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그의 권력 유지에 이순신이 가장 위협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그 시점, 이순신은 체포되었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백의종군의 명을 받아 당시 도원수이던 권율 휘하로 들어갔다. 그것이 1597년 4월 초의 일이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제대로 수군을 통제하지 못한 것으로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다. 그런 원균에게 조정은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증파되는 일본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7년 7월 5일, 원균은 마침내 출전을 감행했다. 전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를 떠나 부산 앞바다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동안 조선 수군의 강점과 약점을 면밀히 파악해 놓고 있던 일본 수뇌부는 원균의 출전 소식을 듣고 야간 기습작전을 준비했다. 일본군은 작은 배 여러 척으로 판옥선을 포위한 후 사방에서 배 위로 올라 백병전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을 해놓고 있었다. 그들은 원균의 성격을 활용, 하루 종일 유인 작전을 펼쳤다. 결국 원균의 조선 함대는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하루 종일 헛힘만 빼고 말았다. 그 와중에 풍랑으로 판옥선 20여 척을 잃었다.


해질 무렵, 마침내 원균은 전 함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어둠이 내리는 가덕도에 상륙한 조선 수군들은 식수를 구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긴장을 풀고 막 배를 대던 조선 수군을 향해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이 기습 공격을 한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가덕도에 정박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은밀히 군사를 매복해 두었던 것이다. 미처 배에서 내리기 전에 상황을 파악한 원균은 전군에 다시 배에 오를 것을 명령했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바다로 빠져나온 조선 함대는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로 향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적은 매복하고 있었다. 역시 정박을 위해 배를 대던 조선 수군은 일본 육군의 매복에 걸려 변변히 저항도 못 해본 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조선 수군이 선택한 것은 또 다시 도주였다. 원균은 함대를 이끌고 칠천도로 이동했다. 다행히 칠천도에는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조선 함대는 칠천도 외즐포에 정박할 수 있었다. 이후 수군은 약 일주일 가량을 칠천도 외즐포에 정박했다. 7월 16일 은밀히 일본군 함대가 조선 함대를 향해 접근했다. 대규모 적선이 여명을 타고 접근해 오는데도 조선 수군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기습을 받은 조선 수군은 우왕좌왕했다. 곳곳에 조선 판옥선이 불타기 시작했다. 원균은 필사적으로 적과 싸우며 수군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있었다. 휘하 장수들이 철수를 요구했다. 그 와중에 경상우수사 배설은 자신의 함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탈출이었다. 원균은 간신히 춘원포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도 따라 상륙했다. 원균은 도주를 포기하고, 마지막까지 단 하나의 적이라도 더 베고 죽겠다고 다짐했고, 적의 칼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적은 더 빨리 강해진다

조선 수군 최대의 비극이자 이순신의 절망이 된 칠천량 패전, 이 해전을 보면 강함과 약함의 역동성을 절감하게 된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에게 연전연패를 당한 원인을 철저히 분석했고, 원균이라는 적장에 대해서도 분석해 해전을 준비했다. 강자의 큰 고통은 고독하다는 것 외에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는 우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바늘귀 같은 방심의 순간, 조직 전체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상대는 그 틈새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강자의 자리에 머물고 싶다면 언제나 상대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추월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추월당하는 것은 순간이다.


벽파진해전


기적은 신뢰의 땅에서 생긴다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의 운명에 검은 먹구름이 뒤덮였다. 조선 조정도 당황했다. 즉시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도원수 권율과 의견을 나눈 이순신은 직접 전황을 살피고 수군 재건을 위해 합천 초계를 출발했다. 합천을 거쳐 진주 땅 수곡에 이르러,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받았다. 이후 이순신은 남해, 하동, 구례, 보성, 순천, 낙안, 장흥을 거쳐 회령포까지 장장 천 리가 넘는 길을 걸었다. 그것은 수군을 다시 재건하려는 행보였다.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몰려나와 술과 음식을 바쳤다. 그리고 울었다. 이순신은 대장정을 통해 군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회령포, 그곳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끄는 12척의 판옥선을 인수했다. 함대를 이순신에게 인계한 배설은 며칠 아프다고 하더니 탈영해 버렸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 맡기면서 힘들면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서 도우라고 했다. 이순신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12척의 판옥선과 1,000여 명이 될까 말까한 수군이 전부였다. 이순신은 본진을 장흥의 회령포에서 해남으로 이동시켰다. 즉각적인 적과의 대규모 전투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수군의 사기 양양이었다. 이순신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게 하고 싶었다.


1597년 8월 28일, 적선 8척이 어란포로 접근해 왔다. 이순신은 적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미 칠천량의 승리로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은 정면 승부를 걸어왔다. 이순신 역시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들의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순신은 직접 간판으로 내려와 강궁을 들고 화살을 쏘았다. 조총을 겨누던 적병 몇이 쓰러졌다. 그제서야 수군들도 활을 쏘기 시작했다. 장군전 한 발이 맨 선두에 있던 적선을 명중시켰다. 적선에 구멍이 뚫리고 선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일제히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8척의 적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남은 적선이 뱃머리를 돌렸다. 혹시 매복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추격해야 한다. 그래서 아군 앞에서 도망가는 적의 뒷모습을 단단히 보여주어야 했다. 이순신은 해남 반도 남단까지 적을 쫓았고, 충분한 추격전 후 함대를 멈추게 했다. 판옥선에서는 함성이 올랐다.


1597년 8월 30일, 또다시 일본군이 벽파진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에 쫓겨 갔다. 이번에는 멀리 추격하지 말도록 했다. 그날은 8월 그믐이었다. 이순신이 적을 멀리 추격하지 않도록 한 것은 그의 승부수였다. “오늘 밤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다. 전군은 전선 위에서 비상 대기하도록 하고, 신기전과 불화살을 충분히 준비하라!” 이순신은 낮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일부러 멀리 쫓지 않았다. 만약 적이 멀리 달아나지 않았다면, 오늘 밤 야습을 해 올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저들은 칠천량에서 어둠을 뚫고 다가와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경험이 있지 않은가.


마침내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본군이 한밤에 기습해 온 것이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불화살과 신기전을 쏘았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고, 변변한 공격조차 못 해본 채 퇴각했다. 이순신 진영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어두운 밤에 불의의 야습을 우리 장군께서 미리 아시고 막아내지 않았는가? 역시 장군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라는 분위기가 진중에 돌았다. 이순신은 안도했다. 이제 군사들은 예전처럼 나를 믿고 따를 것이다.


신뢰의 중심이 되어라

나는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신뢰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이순신은 싸우면서 보여주었다. 적의 대규모 공습을 피하기 위해 자주 진을 옮겼지만, 적이 나타날 때면 어김없이 선두에서 싸웠고 그리고 이겼다. 묵묵한 행동으로 보여줄 때 사람들을 믿기 시작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통찰력이다. 전체 전황을 읽고 남보다 한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필요하다. 이순신이 벽파진에서 보여준 것, 그것이 바로 통찰력이다. 실천과 통찰력으로도 신뢰를 주기에는 뭔가 부족한가? 그렇다면 이제 갖추어야 할 것은 여유이다. 신뢰란 것은 입이 너무 커 여유와 배짱까지도 요구한다.


명량대첩


밀집된 방패가 견고하다

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대규모 일본군 함대가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벽파진에 있던 조선 수군 전 함대를 해남 땅 전라우수영으로 모두 이동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이순신은 대규모 적선이 공격해 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순신은 여러 요소를 고려하여 명량해협 -13척의 전선으로 대규모 적을 막을 수 있는 곳- 을 선택했다. 명량은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물길로, 길이 1.5킬로미터에, 좁은 곳은 폭이 500여 미터가 채 안되는 곳이었다. 드디어 조선 수군이 출정했다. 13척의 판옥선 뒤로는 민간 어선들이 뒤따랐다. 전투 소식은 인근 백성들에게도 퍼졌다. 진도와 해남의 육지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백성들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울돌목 격류 위에 늘어선 조선 판옥선은 고작 13척, 조류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하는 일본 배는 얼핏 보아도 100여 척이 넘었다.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배가 있는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순신은 지금의 진도대교 근처에서 일자진을 형성한 채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살은 거셌다. 목포 쪽으로 흐르는 역류는 자꾸만 조선 함대를 뒤로 밀려나게 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순신은 긴장하는 빛이 역력한 군사들에게 말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것이요, 살기를 작정하고 싸우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라!”


드디어 적선의 앞머리가 명량해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다를 가득 메운 대함대였다. “전 함대! 총통을 준비…… 방포하라!”, “불화살을 쏴라!”, “조란탄을 준비하라!”, 이순신은 연신 명령을 내렸고 대장선의 수군들은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이순신이 옆을 돌아본 순간, 나머지 조선 함대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미 적을 보는 순간 주춤주춤 물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적선은 한꺼번에 4, 5척씩 덤벼들었다. 이순신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보며 정신없이 싸웠다. 뒤처져 있는 아군 함대가 합세해야만 이길 수 있거늘, 이순신은 애가 탔다. 육지의 언덕과 산에서 바라보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시각, 거제 현령 안위는 자신의 배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장선만 적선에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 나머지 조선 판옥선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다. “노를 저어라! 대장선에 접근한다! 장군을 구하리라!” 안위의 배가 이순신에게 접근하자 산 위의 피난민 사이에서는 함성이 올랐다. 안위의 배가 일본군 함대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순신 대장선도 전투를 개시했다. 그때였다. 뒤처져 있던 조선 배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배가 적선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거세게 조선 배를 뒤로 밀고 가던 조류가 천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군에게 순류이던 물살이 갑자기 거꾸로 바뀌면서 역류가 되었다. 전황이 바뀌고 있었다.


일본군은 역류에 휩쓸려 전 함대가 주춤거리고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조선 판옥선이 접근, 치밀하게 포격을 해나갔다. 일본군 장수들은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바다를 가득 메운 파편과 잔해, 그리고 역류를 뚫고 전진하기란 불가능했다. “적장이다! 적장이 물에 빠졌다!" 조선 진영에서 함성이 올랐다. 일본군은 급격하게 전의를 잃어갔다. 후퇴하려 했으나 후퇴도 쉽지 않았다. 뒤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일본군 함대 때문이었다. 마침내 긴 시간이 끝나고 모든 것이 흘러갔다. 적의 시체와 적선의 잔해들은 천천히 명량바다를 벗어나 흘러가고 있었다.


힘을 집중하라

이순신이 명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물길이 좁아 아무리 적이 많이 몰려온다 해도 실제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적선은 10여 척 내외로 제한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둘째, 조류의 방향이 아군에게 유리해진다면 쉽게 적을 밀어붙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셋째, 적에게 포위될 염려가 없었다. 넷째, 암초가 많은 지형이라 물길을 잘 아는 조선 수군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적 열세의 아군 전력을 가장 잘 집중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이순신은 명량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힘의 집중 원리를 잘 이용한 장군들은 전투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나폴레옹 역시 힘의 집중 원리를 누구보다 신봉하던 정복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다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가? 혹시라도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틀림없이 힘이 분산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 지금이라도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술적으로 힘을 집중해야 한다. 그저 그런 상품 백 가지보다 한 가지 일류 상품을 만드는 회사가 살아남는 세상이다. 부디 집중하라! 힘과 전력을, 나 자신의 능력도 분산시키지 마라.


노량해전


바람 앞에 맨몸으로 설 때 비로소 인생의 주인이 된다

명량해전 직후 이순신은 함대를 목포 앞 보화도로 옮겼다. 보화도에 수군 기지를 건설한 후 전선 건조에 박차를 가했다. 보화도 주둔 약 4개월 동안 이순신은 30여 척의 판옥선을 건조했다. 어느 정도 군세가 회복되자 이순신은 기지를 완도의 고금도로 옮겼다. 고흥의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약 5개월 동안 다시 조선 수군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40여 척의 판옥선을 더 건조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조선 수군은 판옥선 85척의 당당한 함대가 되었다. 그러던 1598년 8월, 드디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든 영화가 이슬 같다’는 절명시를 남긴 채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 조선에 있는 모든 일본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전황은 급박하게 변했다. 이제 일본군에게는 안전철수라는 과제가 생긴 것이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순천의 예고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1598년 음력 11월, 순천 앞바다에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려는 일본군과 그들을 끝내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이순신의 조선 함대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 순천 왜성에 갇혀 있던 일본군 연락선 두 척이 명나라 군 진영을 통해 빠져나갔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회유에 넘어간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이 일본군의 연락선이 통과하는 것을 묵인해 주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군 연락선의 임무는 뻔했다. 그것은 구원군 요청일 것이다. 이제 이순신은 협공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1598년 11월 18일, 늦은 오후, 이순신은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즉각 순천 앞바다 봉쇄를 풀고 전 함대를 노량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경남 하동과 남해가 마주 보는 좁은 뱃길, 지금 남해대교가 놓여 있는 그곳이다. 많은 적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역시 좁은 물길이 유리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기다렸다. 일본군 선단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적이 몰려오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드디어 일본군 선단의 앞머리가 노량의 좁은 물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다려라!” 이순신은 긴장하는 수군들을 진정시켰다. 드디어 거대한 함대 무리가 노량의 한 가운데로 들어왔다. “방포하라! 적의 허리를 잘라라!” 이순신은 전 함대를 적의 허리를 향해 진격시켜 근접전을 시도했다. 노량의 좁은 바다에서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서는 근접전밖에 없다는 것을 이순신은 알고 있었다. 판옥선 갑판에서는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 수군과 일본군은 한 덩어리가 되어 흘러가면서 싸웠다. 자정쯤 시작된 전투는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명나라 도독 진린은 전투 초반,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용맹한 조선 수군들의 분투를 보고 그도 마침내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진린은 곧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진린의 전선을 구해냈다. 진린은 새삼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일본군은 퇴로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관음포로 몰려 들어갔다. 관음포는 남해 섬의 깊숙한 만이었다. 일본군은 그곳을 물길이 뚫린 곳으로 착각했다. 관음포로 몰려 들어간 일본군은 앞길이 막히자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수군들은 ‘이 싸움은 우리가 이겼다는 것을, 마침내 이 전란을 우리 손으로 끝낼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음포에 갇힌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고 있었다. 이순신은 직접 독전고 복채를 쥐었다. 그리고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을까. 뿌연 포연 속에서 일본군 조총이 이순신을 노리고 있었다. 혼전 중이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순간, 일본군 조총에서 불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이순신은 가슴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조선 수군들은 방패로 이순신을 둘러쌌다. 조카 이완이 이순신을 부축했다.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순신의 유언대로 그의 죽음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고, 조선 수군은 전투를 마무리했다. 일본군은 수백 척의 피해를 남기고 퇴각했으며, 순천 왜성에 숨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도 남해 먼 바다를 통해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곧 조선 수군 전체에 알려졌다. 승전고 높던 노량 관음포 바다에는 깊은 슬픔이 흘렀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가장 길고 치열했던 노량해전, 조선 수군의 승전과 조선국의 승리, 그리고 이순신의 전사로 노량해전은 끝났으며, 마침내 길고 길었던 임진왜란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인생은 스스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순신이 죽고 그날로 임진왜란은 끝이 났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숱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첫 번째 근거는 이순신이 전사 당시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이순신의 자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이유를 당시의 최고 권력자 선조와 연관해서 해석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전쟁 막바지,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전후 권력이 어떻게 개편될 것인지에 더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핵심에 이순신이 있었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순신은 선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주목의 대상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순신은 전쟁 영웅이었다. 더구나 이순신에게는 임금도, 조정 대신도 갖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민심이었다. 적어도 이순신 옆에만 있으면 죽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다. 임금도 조정 대신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순신의 생각은 단순했을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조선 수군 삼도통제사였다. 무인이었다. 무인은 적과 싸워야 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장수로서, 조선의 장수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운명 같은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것은 아름다운 완성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걸을 때, 그 사람의 인생은 완성된다. 오늘날 이순신이 우리에게 다시 울림을 주는 것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그 용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은 공평하여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삶을 부여했다.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 지금 나의 삶은 가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의 완성을 향해 가라. 아무도 대신 갈 수 없는 좁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 내 앞에 남아 있는 생, 그것의 주인은 나 자신이며 그것을 완성해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다.


상기 내용 외에 이 책에는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당포해전, 율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해전, 웅천해전, 예교해전 등에 관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출처 : 복음과 삶
글쓴이 : 코람데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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