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두메 산골 십자가 5월 밤하늘에 빛나다
“얼마나 골이 깊었는지 반란군조차 안 들어왔어요. 갈계리는 그만큼 길이 험해.”
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 갈계교회 최순남(71) 권사 얘기다. 갈계교회 설립자 최진욱 장로(1984년 작고)의 4남3녀 중 큰딸. 위로 오빠가 넷이다.
여기서 반란군이란 빨치산을 말한다. 1945년부터 53년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당 비정규군이다. 53년 9월 남한 빨치산 총수이며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사살될 때까지 지리산 일대는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전북도당 남원군당은 51년 12월까지 활동했다.
그런데 28년 세워진 갈계교회는 보급투쟁(빨치산이 살아남기 위해 식량 등을 약탈하는 행위) 과정에서도 멀쩡했다. 순교자가 속출했던 상황에서 해방구나 다름없던 동네가 피해를 입지 않다니…그만큼 오지란 얘기다.
그러나 이 두메산골도 50년 발발한 한국전쟁 기간엔 온전할 수 없었다. 당장 최 권사의 아버지 최진욱 장로가 인민군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뱀사골 쪽으로 끌려갔다. 마을 구장 등도 굴비 엮듯 엮어 데려 갔다.
“저도 잡혀 가는 거 봤어요. 훗날 어머니에게 들었는데 찬송가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부르시며 가셨다고 하더군요. 처형만 남았었지요. 왜정 때 독립운동하면서도 살아남으셨던 분이었대요.”
최 장로는 살아 돌아왔다. “인민군과 빨치산이 찬송가를 부르는 아버지의 초연함에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들었다”고 전했다.
갈계교회는 미자립교회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리는 마을 앞 풍천에서 모래로 블록을 만들어 헌당한 교회당이 지금도 옹색하게 마을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15명 남짓 출석하나 70대 이상 할머니들이다. 강기원(43)목사 자녀 예빛(5)과 수빛(2)이 예배 시간에 휘젓고 다니는 것이 반가울 정도다.
그런데 이 작은 교회가 민족 분단과 개신교 분열의 현실을 고스란히 안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도 함께한다면, 그리하여 쓰러져 가는 농촌 및 신앙공동체를 살리는 ‘교회의 참된 터’로서 자리매김한다면 사람의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는 예수의 메시지가 30가구 남짓한 마을에 주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지난 19일 도착한 마을. 백두대간 시리봉이 멀리 보이고 오른쪽에 청룡산, 왼쪽은 마갑산이 자리했다. 그 사이 아늑하게 자리 잡은 갈계리. 풍천을 가운데 두고 논이 펼쳐져 있다. 한데 동구에 서면 작은 마을에 십자가 종탑 2개가 좌우로 유난하다. 직선 거리 100m. 마을을 마주하고 오른쪽은 갈계교회, 왼쪽은 갈계서부교회. 둘 다 장로교회로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리되면서 이 시골에까지 여파가 미친 것이다.
그 무렵 장로교는 성장통을 겪으면서 40∼60년대까지 4차에 걸친 대분열을 맞는데 이 마을 두 교회는 2차 분열의 결과다. 분열은 신학적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조선에 들어온 이후 한국 개신교는 지경을 넓혔고 대부흥과 자기성찰의 과정에서 종파를 낳았다.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특징이다. 건강한 교회공동체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종파이기도 하다.
53년 갈계서부교회가 분리됐다. 그 후 마을엔 동서선교분리선이 암묵적으로 형성됐다. 한 마을에서 신앙생활에 따른 분쟁이 없이 지내온 것도 이 분리선 때문이다. 연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 권사의 칠순 잔치 공동 진행, 아영면 기독교연합회의 경로대학과 연합부흥회, 주일예배 후 공동식사 및 봄나들이 등이 일치의 가능성이다. 달리 형제교회인가.
다만 장자교회인 갈계교회는 요즘 공동체 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인은 고령화되고 인구 유입은 없어서다. 또 수년 전 번듯한 회당을 헌당한 갈서교회(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와 비교돼서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농촌교회 어느 곳도 신앙공동체 유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갈계교회에 강기원 목사가 부임한 것은 2005년. 경북 안동 사람인 그는 갈계교회 부임을 놓고 갈등했다. 그리고 기도 끝에 ‘양무리를 버리는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동서선교분리선이 존재했고, 농촌공동체 해체는 끝 간 데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북 분단을 그린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박광현 감독이 어린 시절 이 마을에서 지낸 것이 예사롭지 않다.
“설교 시간에 교회가 자립해야겠다고 얘기했어요. ‘목사가 설교, 기도, 심방에 열심이면 된다. 목사님 손에 흙 묻게 할 수 없다’는 교인의 반발이 심했어요. 몇 개월을 설득한 끝에 청국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소쟁기로 경운기조차 들어갈 수 없는 콩밭을 갈면서였어요. 이 디지털시대에 말이죠.”
이복남(2009년 작고), 박미분(88), 민주식(83) 권사 3인방이 더러 툴툴대면서도 젊은 목사 뜻을 받들었다. 이들이 고령으로 물러난 뒤 최순남 권사를 중심으로 안점옥(80) 박복순(76) 김숙자(75) 직분자들이 열심이다. 요즘은 청국장에 감식초를 추가해 사시사철 생산에 힘쓴다. 가내수공업이지만 말이다.
연매출은 300만∼400만원선. 적은 돈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와 마을을 위한 기금마련이기에 기도와 찬송으로 하루를 연다.
“하나님께서 저를 ‘전선(戰線)’에 세우셨을 땐 뭔가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분단의 비극, 교회 분열, 현격한 도농 차이 등의 현장이니 예수 평화의 메시지를 꼭 전해야겠지요. 도농직거래 등으로 쌓인 기금으로 마을문화제를 여는 것이 일차적 목표입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강 목사와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돌았다. 산골마을 아름다운 풍광이 매료시킨다. 그리고 솔 숲과 대나무 숲 앞 쪽으로 집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젊은 귀농자 집 3채였다. 그들은 비록 동서선교분리선 서쪽 편 사람들이지만 말씀이 있는 한 선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화해는 세대를 달리하면서 급격하게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산마루에 오르니 멀리 풍천이 보인다. 74년 이종태 전도사를 비롯한 뜨거웠던 심령들은 “우리 교회 지읍시다”는 이 전도사의 말에 풍천 모래로 지금의 갈계교회를 헌당했다. 그 뜨거움이, 크리스천 농촌운동가 최용신 전도사가 그랬던 것처럼 지리산 자락에서 강 목사를 중심으로 신(新) 브나로드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을 골목을 지날 때 깔끔한 초등학생 하나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다. 깜짝 놀랐다. 귀농자 집 자녀였다.
■ 갈계교회 가는 길
서울 강남터미널에선 남원행, 동서울터미널에선 인월행 버스 이용. 3시간 소요. 1시간에 1∼2대씩 있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교회까지 가려면 아영행 버스를 타고 갈계리에서 내리면 된다. 1시간에 1대꼴. 인월버스터미널에선 함양행 버스 이용해 갈계리 하차. 철도는 서울-남원 16회. 청국장 및 감식초 주문은 010-9944-6415. 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 383-1 갈계교회(063-626-5058).
■ 근처 맛집 - 황산토종정육식당
지리산 바래봉 철쭉축제를 구경 가는 길목에 이 지역 브랜드 상품인 토종 흑돼지 생고기 전문점이 자리 잡고 있다. 남원시 운봉읍 초입에 위치한 ‘황산토종정육식당(063-634-7293)’이 그곳. 식당 바로 건너편이 지리산 둘레길 출발점이기도 해 널찍한 식당 안은 활짝 핀 철쭉꽃처럼 울긋불긋 나들이 차림의 손님들로 가득하다.
음식점에 들어서면 신명철씨가 아들 성수씨와 함께 손님을 맞이하고 주방은 솜씨 좋은 안주인이 책임진다. 이 식당은 청정지역 지리산자락에서 허브로 키운 고원 흑돈만을 취급한다.
반찬류도 입맛을 댕긴다. 물 맑고 공기 좋은 500m 고원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 각종 나물이 씹을수록 향이 더하고 깊은 맛이 배어난다. 인근 인월면의 신씨 처가 텃밭에서 무농약으로 키운 배추와 지리산 자락의 돈나물 머위 곰취 등 산나물.
하루 동안 잘 숙성시킨 생고기 위에 녹차 허브 솔잎 등을 뿌려 나온 쫄깃하고 식감 좋은 꺼먹돼지를 노릇하게 구어 먹다가 중간 중간 3년 묵은 김치에 싸 먹는 맛도 일품이다. 옻나무 엄나무 오갈피 헛개나무 등을 넣고 숙성시킨 메주로 끓여낸 된장찌개도 이 집의 별미. 대창만으로 만들어 큼지막한 순대가 돋보이는 순댓국도 과객의 기운을 북돋우기에 제격이다.
흑돈삼겹살 9000원, 소등심 소육회 각 2만원, 소고기불백 2만5000∼3만원, 된장찌개 순댓국 뼈다귀탕 각 6000원. 88고속도로 지리산IC에서 운봉 방향 6㎞지점 운봉읍 초입에 위치. 전북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135-7.
남원=글 전정희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국민일보, 201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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