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한국교회역사탐방

[국민일보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11) 양평 상심리교회

하마사 2014. 3. 11. 17:34


남한강변을 끼고 있는 양평군 상심리교회를 주목하면서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키워드가 있었다. ‘이자벨라 비숍’과 ‘조운선(漕運船)’. 이질적이기까지 한 이 키워드는 전근대와 근대를 이어주는 맥락이다.

고려와 조선은 조운선을 통해 경향 각지에서 세수미를 걷었다. 남한강변 양평과 원주 내륙 깊숙한 강창(江倉)에서도 경창(京倉)으로 향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1894년부터 4년여 동안 전근대의 한국을 탐험했다. 마포나루에서 송파를 거쳐 양평 남한강길 등을 통해 내륙을 여행했다. 비숍은 서양문명을 재빠르게 받아들인 일본을 두고 ‘기독교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오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남한강 물길 따라… 뱃길 따라… 말씀 이어진 복음 나루터

상심리교회(한종환 목사)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2리에 있는 시골교회다. 교회 마당에서 힘차게 달려 남한강에 풍덩 뛰어들어 멱을 감을 수 있는 그런 교회다. 1990년대 이전까지 중앙선 국수역에 내려 터벅터벅 오솔길을 걷고 고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름이면 서울 교회학교들이 상심리교회를 통째로 빌려 수련회를 하곤 했다.

이 상심리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5년이다. 이미 기울 대로 기운 대한제국의 백성은 무기력과 미신,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었다. 탐관오리의 세상이었다. 구한말 선교사들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오지를 누볐다.

그 전도여행 루트 중 하나가 한강 뱃길이다. 소달구지 지날 번듯한 길도 없던 시절 양평 상심리(현 대심리)는 나루터가 형성된 교통 요충이었다.

그런데 이 남한강 뱃길을 통해 상심리에 성경이 전래됐다. 1903년 박응용 권서(勸書·성서공회 소속으로 성경을 팔며 전도하던 사람)가 서울 성서보급소에서 성경을 한 짐 지고 양평 일대를 방문했다. 영국 성서공회 1911년 1월호 전도보고서는 ‘박씨가 상심리에 가서 성서를 전하고…농부 배씨 부부와 그 마을 유지 차씨 등에게 전해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1906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밀러 총무와 담당 선교사가 상심리를 방문했을 때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20여명의 교인이 출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상심교회 60년사’는 ‘참판을 지냈던 김희수라는 사람이 서학에 호기심을 느껴 1905년 자신의 처남인 안국동교회 장로 박승봉에게 성경과 전도지를 받아 믿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양평기독교회 100년사’ ‘이천지방감리교회사’ 등에 상심리를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벌였다는 기록에 미루어 상심리교회 설립은 한동안은 개인 차원에서 전도가 이뤄지다가 1905년 사랑방예배를 통해서 이뤄졌던 것을 알 수 있다.

106년 전통 상심리교회의 설립 배경을 밝히는 이유는 이 마을 차상진 배운길 노윤용 노성원 등 초기 교인이 권서 등으로부터 입수한 성경을 읽고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모르는 예배 형식에 대해서 서울 연동교회 등을 찾아가 배워 설립한 자생 교회라는 점이다.

고령의 노흥산(101) 은퇴장로의 구술에 따르면 “낮에 사랑방 안에서 엉덩이를 들고 수군수군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몰라 묻곤 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며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얘기를 당시 교회 어른들께로부터 들었다”고 상심리교회사를 통해 남겼다.

이렇게 자리를 잡은 상심리교회는 복음 증거에 나서 묘곡교회 문호교회 양평읍교회(현 양평장로교회) 고읍교회 곡수교회 고송교회 등을 세우며 어머니교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특히 상심리교회는 팔당댐이 건설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까지 양평 복음의 전진 나루터였다. 물류가 남한강을 통해 오갔기 때문이다. 김종한(81) 은퇴장로는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강원도에서 벌채한 뗏목이 교회 앞을 지나갔고, 마을은 강 건너 강하면을 잇는 요충이어서 유흥시설이 있을 정도로 흥청댔다”고 말했다.

그러나 팔당댐으로 수운이 막히고 도로 발달로 나루터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마을은 한적한 강촌으로 변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였다.

김 은퇴장로의 아들 김대수(54·양평군농업기술센터 소장) 장로의 얘기.

“70년대엔 마을 규모는 예전보다 못했으나 신앙심만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어요. 마을 주민 90% 이상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가 곧 마을이요, 마을이 곧 교회다’고 할 정도였죠. 그 무렵 팔당댐 아래서는 부교를 이용한 선상 술집이 유행이었는데, 옛 상심리 나루터에도 술집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제지했었지요. 신형 냉장고 2대를 교회가 가게에 구입해 주고 술을 팔지 않도록 요청했고요. 술 안 파는 동네라고 소문이 난 것은 당시 마을 주변에 새마을연수원이 있었는데 이들이 몰래 술, 담배를 사기 위해 동네 가게를 찾으면서 술을 팔지 않는다는 얘기에 놀라 입소문을 낸 것이 ‘술 없는 마을’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죠.”

89년 한종환 목사(당시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상심리교회는 제2의 부흥기를 맞게 됐다. 40명 남짓한 교인이 현재 10배로 늘었고 선교 영역도 해외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전원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30 남짓한 가구가 150여 가구로 늘었다.

지난 6일 주일예배. 옛 예배당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심리교회 100주년 기념예배당은 원주민과 은퇴 전원생활자들이 섞여 예배와 교제, 나눔을 이어갔다. 기념예배당은 미션스쿨인 서울 경신고 채플 시간에 학생들이 낸 헌금이 모토가 됐다. 목회자 사례비도 대기 힘든 70년대 농촌교회에 목회자 양식이나 대라고 채플 헌금으로 교회 명의의 논을 사놓은 것이 기념예배당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 목사는 “우리 교회 역사는 축약된 한국 교회사이기도 하다”며 “이제 상심리교회가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우고, 홍천에 복지시설을 세워 나눔의 헌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고백했다.

상심리 앞 남한강 뱃길을 통해 조선을 여행했던 비숍은 어쩌면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예견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일본과 이를 수용한 조선을 비교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선교사에게 받은 성경을 받아 읽고 이를 내륙 깊숙이 전하며 성장하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상심리교회는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옛 교회당을 보존하고 옛 당회록을 챙겨 후대를 위한 역사관을 준비하고 있다. 상심리교회는 이제 물길을 따라 ‘복음의 조운선’이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가는 나루터가 되고 있다.

■ 상심리교회 가는 길

서울 청량리 기차역에서 1시간마다 2∼3차례 운행하는 광역전철을 이용해 국수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1시간30분 소요. 국수역에 내려선 택시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교회까지 가야 한다. 거리는 2㎞로 보통 걸음으로 25분 정도 걸린다. 일반 버스 이용 시 동서울터미널에서 양평·홍천행 버스를 타고 국수리 양평공고에서 하차해 1.2㎞ 정도 걸어 들어간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2리 43-2 상심리교회(031-772-7238).

■ 근처 맛집-안흥 촌두부 밥상

탁 트인 남한강을 따라 6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양평군 양서면 국수리 양평공업고등학교 못미처 ‘안흥 촌두부 밥상’(031-774-4034)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심리교회 이명화 집사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알콩달콩 꾸려가는 콩요리 전문식당이다.

두부 만들기는 남편 심홍섭 안수집사가, 반찬류와 주방은 이 집사, 된장 간장 등 장류는 노모 정규동 권사가 담당한다.

친환경농업특구인 양평지역의 흰콩을 강원도 고성의 깊은 바다에서 길어온 맑은 해수에 담가 불렸다가 맷돌에 직접 갈아 정성껏 만든 두부류는 담백하고 고소하다. 이 때문에 단골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양은냄비에 뜨끈하게 담겨 나오는 우윳빛 연두부, 양념장을 살짝 얹은 모두부, 얼큰한 콩비지 등이 입맛을 돋운다. 이 음식을 양껏 먹다가 적당히 남겨 공기밥과 함께 생채 열무김치 나물 고추장 등을 넣고 썩썩 비벼 한입 가득 넣으면 ‘역시 손님 많은 집은 이유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음식은 표고버섯 양파 멸치 다시마로 만든 천연조미료로 간을 맞춘다. 양지머리를 푹 삶아 우려낸 우거지밥상도 일품이다. 두부김치찌개, 도토리묵밥도 먹음직스럽다.

감자떡도 반드시 먹어 봐야 할 별미. 녹두로 꽉 차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다. 손님들이 따로 주문해 싸 가는 대표적 품목이다. 정성이 담긴 음식을 저렴한 값으로 알차게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촌두부와 우거지밥상이 각 6000원, 두부김치찌개 7000원, 도토리묵밥과 감자떡 각 5000원.

양평=글 전정희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국민일보, 201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