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한국교회역사탐방

[국민일보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8) 나주 광암교회

하마사 2014. 3. 11. 17:26


굽이굽이 영산강이 안고 너른 더뱅이 들녘이 품다

촌부 김추련(76).

전남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 광암교회 은퇴 권사이다. 나주 봉황면 옥산 태생으로 1953년 광암리 김성철(2000년 작고)씨와 결혼해 지금까지 광암교회를 섬기며 살고 있다.

교회 아래 너른 집에서 홀로 거하며 날마다 기도로 자식과 교회, 나라를 걱정한다. 신앙으로 키운 다섯 자녀 모두 사회의 엘리트가 되어 어느 하나 아픈 손가락이 없는 복을 받았다. 자식들은 광주와 서울 등서 살며 수시로 어머니와 모교회를 찾는다. 행복한 노년이다.

시골 광암교회.

출석 교인 70명 남짓한 교회다. 영산강을 낀 호남평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나 인구 감소와 노령화로 애를 먹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교회.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주일 출석만 2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이 교회는 설립 10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주지역 장자 교회다.

지난 16일 김 권사의 집 거실에서 몇 권의 앨범을 뒤적였다.

“이분이 제 시어머니 박경애씨입니다. 남편이 평생 당신 지갑에 넣고 다니던 흑백 사진이죠. 시어머니는 동란(6·25)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저는 뵙질 못했어요. 다만 시어머니 동생 되시는 박화성(1904∼1988·소설가)씨가 훗날 저보고 ‘우리 조카며느리 고생 많이 한다’며 걱정해 주던 기억이 납니다.”

촌부의 증언이 없으면 광암교회는 그 의미가 작아질 한국교회사의 한 장이다. 증언 등을 바탕으로 교회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근대 기독교사의 지형을 읽을 수 있는 사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897년 미국 남장로교는 나주선교부를 세웠다. 소속 선교사 유진 벨(1868∼1925)은 그해 목포에서 영산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와 나주 영산포에 닿은 뒤 나주성 안에 초가집을 사서 전도에 나선다. 성 밖에도 토지를 구입해 교회를 짓고자 하나 보수적인 나주 양반의 반대로 청년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며 쫓겨나게 된다. 유진 벨은 이때 자신의 조선어 교사였던 이문오에게 나주지방 선교를 맡기고 목포로 돌아간다.

이후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1903년 김치묵에 의해 광암 예배처소(광암교회 전신)가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김치묵이 유진 벨 및 전도인 이문오 김윤환 등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김치묵은 그 지역 유지였다.

“시할아버지가 김치묵 어르신입니다. 시아버님 김재섭 어르신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어요. 그때 시어머니도 같은 학교 교사였지요. 거기서 만나 결혼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할아버지가 아들 내외를 광암리로 내려오라고 하셨던 겁니다.”

김재섭 박경애(희경이라고도 한다) 부부는 광암교회를 섬기며 교회를 중심으로 농촌계몽활동을 펼친다. 광암학당도 설립하고 부부가 어린이, 청년, 부녀자 등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동네 어른들이 내게 ‘당신 시어머니에게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됐다’는 얘기를 시집와서 많이 들었다”고 김 권사가 전했다.

박경애·화성(본명 경순) 자매는 목포 부잣집 딸이었다. 유진 벨이 세운 목포 정명여학교 등서 신식 교육을 받은 이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경애씨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뜻을 따라 신여성의 길을 포기하고 농촌에서 전도와 계몽에 힘썼다.

훗날 한국 첫 여류 소설가가 된 박화성에게 언니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였다. 아무리 지주 집안에 시집갔다고는 하나 더뱅이라는 광암리 들녘의 농사꾼 아낙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목포라는 개명한 도시 부잣집 신여성의 몰락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분은 제 시아버지를 미워했다고 해요. 당신 언니를 이런 시골로 데려와 고생시키니 안 그랬겠어요. 조카들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혼내고 그랬다는군요. 그러면서도 언니집에서 얼마씩 묵으며 소설을 쓰곤 했답니다.”

김 권사는 남편의 구술과 자신의 기억을 비망록을 펼치듯 살렸다.

자료와 구술 등을 종합해 볼 때 신여성 박경애가 40대 이른 나이에 죽은 배경에는 20세기 초 ‘문명의 충돌’에 따른 혼돈이 주 원인으로 보인다. 광암교회를 무대로 한 박화성 소설 ‘한귀(旱鬼)’가 초기 한국 크리스천의 인간적 갈등과 외부적 박해를 잘 전개한 리얼리즘 소설에 속하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귀’의 주인공 성섭은 인텔리 소작농이자 크리스천이다. 나주 들녘에 가뭄이 들어 온 가족이 보리죽으로 연명하게 되고 그의 아내는 자식 못 먹이는 것이 안타까워 신앙을 포기하고 자살하겠다는 극언을 한다. 마실 물조차 떨어지자 동네 사람들은 서양 귀신 운운하며 미국인 선교사에 몰매를 가한다. 그런 와중에도 성섭은 선교사를 지키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지주에게 소작 쌀을 바친다. 궁핍이 극단에 이른 어느 날 굶주린 개가 성섭의 아내와 자식을 물어뜯는다.

또 마을 사람은 예수쟁이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며 교회당을 때려 부수려 한다. 이 소식을 접한 성섭과 교인은 새벽기도회를 연다. 아침이 되자 곡괭이 등을 들고 광암교회로 몰려든 군중. 그때 번개와 천둥이 그들을 때린다. 혼비백산하고 달아나는 무리….

“그 무렵 한국 기독교가 당한 박해 모습이죠. 고난이 거셀수록 기도에 매달렸던 교인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우리 삶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2008년 부임한 이종문 목사의 얘기다. 나주의 최대 교회 나주교회 출신인 그는 장자 교회의 부임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선교 2세기를 펼치려 하고 있다.

마을을 굽어보는 교회는 60년대 후반 헌당된 예배당 옆으로 반듯하게 자리 잡았다. 시골교회 살림인지라 옛 예배당을 헐지도, 보존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다. 이제 교회 주변 평야는 나주혁신도시가 되어 덤프트럭이 쉴 틈 없이 드나들고 있다. 광암교회를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지 누구도 모른다. 다만 신앙을 유업으로 받은 이들이 있는 한 말씀은 살아 계실 뿐이다.

앨범 마지막 장을 넘길 때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신앙의 3대 김성철 장로의 칠순 예배를 보는 장면. 유업을 받든 4대가 집 마당에 앉아 성경을 앞에 두고 한복 복장으로 기도하는 사진이었다.

나주=글 전정희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hjeon@kmib.co.kr

■ 박화성

한국 첫 여류소설가. 목포 정명여학교 서울 숙명여고보, 일본여자대학 졸업. 시조작가 조운을 만나 문학을 본격 시작하고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등단. ‘한귀’ ‘홍수전후’ ‘고향없는 사람들’ 등 사회성 강한 120편을 남겼다. 문학평론가 천승준, 소설가 승세, 영문학자 승걸(전 서울대 교수)을 두었다.

■ 광암교회 가는 길

서울을 기준해 호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나주시 영산포행과 나주행이 1일 각 6차례. 4시간10분 소요. KTX는 용산역서 4차례. 3시간 소요. 일반 열차도 하루 8차례 다닌다. 나주터미널에서 광암교회를 가려면 금천·광암리행을 타고 광암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1시간 간격. 차로 5∼10분 거리. 전남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 361-1 광암교회(061-331-7129).

■ 근처 맛집‘오병이어 유선추어탕’

‘오병이어 유선추어탕’. 상호부터 은혜스럽다. 누가 언니, 동생인지 구별이 안 가는 광암교회 권사 자매가 환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다.

나주시 성북동에 위치한 오병이어 유선추어탕(061-332-9939)은 사장인 언니 나경순(65) 권사와 맹물도 맛있게 끓인다는 동생 경애(62) 권사가 오순도순 운영하는 추어탕전문점. 교회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논바닥 속의 산삼으로 불리는 미꾸라지. 제철에는 봉황면 들녘에서 잡은 자연산 미꾸라지를 많이 사용하지만 요즘은 어쩔 수 없이 양식 미꾸라지를 주로 사용한다. 경순 권사는 “양식 미꾸라지도 청정지역에서 무항생제로 키운 최고품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산과 큰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며칠간 깨끗한 물로 씻어내 비린내를 없앤 뒤 산초, 콩기름을 넣고 푹 고아서 뼈째 갈아 걸러낸 후 집된장, 들깨가루에 배추시래기를 넣고 다시 한 번 끓여낸다. 그래야 걸쭉하고 구수한 전라도식 추어탕이 완성된다.

대부분의 식재료는 전남 영암에서 농사짓는 큰오빠가 친환경 농산물로 공급해 준다. 탕과 함께 나오는 밑반찬 역시 정갈하고 맛깔스럽다. 얼큰하고 진한 국물과 부드러운 계란찜, 심심하고 시원한 콩나물, 상큼한 파래무침 등이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윤기 흐르는 나주쌀밥 한 숟가락에 바깥주인이 직접 잡아와 담근 토하젓을 얹어 먹는 맛도 일품이다. 잘 삭힌 영산포 홍어와 부드러운 돼지고기를 묵은지에 싸먹는 삼합 또한 이 집의 별미.

주일은 당연히 쉰다. 또 메뉴판엔 술 이름이 없다. 추어탕 7000원. 순두부·김치찌개 각 6000원. 삼합 2만∼3만원.

글·사진=곽경근 선임기자

-국민일보, 201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