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일리 = 금아라 기자] 한국 코미디언의 대부이자 '개다리춤'의 원조, 故 배삼룡(84)은 화려함과 쓸쓸함속에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국민 코미디언으로 칭송받으며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낸 동시에 투병생활을 시작했던 말년에는 그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살았다.
배삼룡은 1926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1946년 악극단 ‘민협’ 활동으로 코미디와 연을 맺은 후 1969년 MBC에 입사, 코미디언으로서 본격적인 데뷔무대를 밟게 됐다.
지금의 언더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악극생활로 동료인 서영춘 구봉서보다 본격 데뷔가 늦었지만, 비틀 걸음으로 '비실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70년대를 주름잡았던 바보연기 첫 스타트를 끊으면서 구봉서, 이기동, 서영춘 등과 함께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렸다. '웃으면 복이 와요', '부부 만세' 등 출연하는 프로그램마다 국민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당시 하늘을 찔렀던 인기는 1973년12월에 발생했던 일명 ‘배삼룡 대낮 납치극’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과열 캐스팅 경쟁을 이어가고 있던 KBS와 TBC, MBC 등이 ‘흥행 보증수표’ 배삼룡을 서로 데려가기 위해 대낮 납치극 소동을 벌였던 것.
배삼룡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동아방송의 '명랑 스테이지' 공개방송을 마치고 나오자 순식간에 방송사 직원 30여 명이 나를 에워싸고 엎치락뒤치락하며 납치를 기도했다. MBC 차에 오르려는 순간 TBC 차량이 바로 옆으로 돌진하다 구경하던 사람의 발을 치기도 했다"고 인기 절정 시기에 겪었던 그 당시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코미디계의 전설적인 존재이자 ‘개다리춤의 원조’ 배삼룡은 등장과 함께 활발한 활약으로 코미디붐을 일으켰고 배삼룡 코미디의 여파로 이후 한국 코미디는 이주일, 심형래, 김형곤 등의 계보로 이어지는 또다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방송외에도 1965년 '상해 55번지' 단역을 시작으로 '의처소동' '운수대통' '형사 배삼룡' '마음이 약해서' '철부지' 등ㅡ이 영화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아 2003년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문화훈장, 2009년 제1회 대한민국 희극인의 날 자랑스러운 스승님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를 기점으로 배삼룡은 인생의 첫 고비를 맞게 된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저질 코미디언으로 취급받아 방송출연 정지처분을 받았고 자신이 설립한 음료업체 삼룡사가 도산하게 되자 3년간 미국 망명생활을 하게 됐다.
귀국 후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활동을 재개 했지만 전같은 인기를 구가하지 못했다. 세번의 결혼 생활이 준 경제적 심적 부담도 감당해야했다.
2007년 6월 서울 목동의 한 행사장에서 쓰러진 이후 폐렴으로 병원치료를 받게 되면서는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2008년 12월, 약 1억 3천여 만원에 달하는 병원비 체납으로 소송을 당해 병원서도 쫓겨날 판까지 이르렀다.
그 외에도 친아들 배동진씨와 1976년 '배삼룡 리사이틀'을 도운 인연으로 부자 인연을 맺었던 양아들 이정표 간의 감정다툼으로 집안분란이 일어난 가운데 투병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국민 코미디언으로 칭송받으며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낸 동시에 투병생활을 시작했던 말년에는 그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살았다.
배삼룡은 1926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1946년 악극단 ‘민협’ 활동으로 코미디와 연을 맺은 후 1969년 MBC에 입사, 코미디언으로서 본격적인 데뷔무대를 밟게 됐다.
지금의 언더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악극생활로 동료인 서영춘 구봉서보다 본격 데뷔가 늦었지만, 비틀 걸음으로 '비실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70년대를 주름잡았던 바보연기 첫 스타트를 끊으면서 구봉서, 이기동, 서영춘 등과 함께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렸다. '웃으면 복이 와요', '부부 만세' 등 출연하는 프로그램마다 국민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당시 하늘을 찔렀던 인기는 1973년12월에 발생했던 일명 ‘배삼룡 대낮 납치극’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과열 캐스팅 경쟁을 이어가고 있던 KBS와 TBC, MBC 등이 ‘흥행 보증수표’ 배삼룡을 서로 데려가기 위해 대낮 납치극 소동을 벌였던 것.
배삼룡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동아방송의 '명랑 스테이지' 공개방송을 마치고 나오자 순식간에 방송사 직원 30여 명이 나를 에워싸고 엎치락뒤치락하며 납치를 기도했다. MBC 차에 오르려는 순간 TBC 차량이 바로 옆으로 돌진하다 구경하던 사람의 발을 치기도 했다"고 인기 절정 시기에 겪었던 그 당시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코미디계의 전설적인 존재이자 ‘개다리춤의 원조’ 배삼룡은 등장과 함께 활발한 활약으로 코미디붐을 일으켰고 배삼룡 코미디의 여파로 이후 한국 코미디는 이주일, 심형래, 김형곤 등의 계보로 이어지는 또다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방송외에도 1965년 '상해 55번지' 단역을 시작으로 '의처소동' '운수대통' '형사 배삼룡' '마음이 약해서' '철부지' 등ㅡ이 영화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아 2003년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문화훈장, 2009년 제1회 대한민국 희극인의 날 자랑스러운 스승님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를 기점으로 배삼룡은 인생의 첫 고비를 맞게 된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저질 코미디언으로 취급받아 방송출연 정지처분을 받았고 자신이 설립한 음료업체 삼룡사가 도산하게 되자 3년간 미국 망명생활을 하게 됐다.
귀국 후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활동을 재개 했지만 전같은 인기를 구가하지 못했다. 세번의 결혼 생활이 준 경제적 심적 부담도 감당해야했다.
2007년 6월 서울 목동의 한 행사장에서 쓰러진 이후 폐렴으로 병원치료를 받게 되면서는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2008년 12월, 약 1억 3천여 만원에 달하는 병원비 체납으로 소송을 당해 병원서도 쫓겨날 판까지 이르렀다.
그 외에도 친아들 배동진씨와 1976년 '배삼룡 리사이틀'을 도운 인연으로 부자 인연을 맺었던 양아들 이정표 간의 감정다툼으로 집안분란이 일어난 가운데 투병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2010/2/23, 마이데일리
* 故 배삼룡은 2월 23일 오전 2시 10분께 향년 84세의 나이에 지병인 흡인성 폐렴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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